떠나볼까요, 아이슬란드? - 여행 9일 차
우리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출국은 다음날이긴 하지만 아침 일찍 출국하는 까닭에 여행은 이날로 끝이 난다. 이날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뜬 곳은 스나이펠스네스 반도의 북쪽 해안 마을 올라프스비크였다. 여기서 출발해서 삭스홀 분화구, 어부의 돌로 유명한 디우팔론산두르 해변, 론그란가드 전망대, 해르나르 전망대 등을 거쳐 물개 서식지인 이트리툰가 등 스나이펠스네스 반도의 유명 관광지들을 두루 둘러볼 예정이었다. 북쪽에서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며 반시계 방향으로 반도를 한 바퀴 돌아 남쪽 해안선 쪽으로 가서 남쪽 해안선을 타고 스나이펠스네스 반도를 빠져나오는 루트인데 이트리 툰가는 남쪽 해안선 가운데쯤에 위치해 있어 스나이펠스네스 반도 여행의 다섯 번째 방문지였다. 그런데 이트리툰가를 다녀온 사람들 중 물개를 직접 봤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곳이 물개 서식지이긴 하지만 물개를 보려면 아침 일찍 가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침 일찍이 얼마나 일찍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우리가 계획한 대로 다른 곳을 둘러보고 간다면 물개를 보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물개를 보자면 이트리툰가를 맨 먼저 방문해야 하는데 그렇게 했을 경우 다른 여행지로 되돌아가자니 또 거리가 너무 멀고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다. 모두를 다 볼 수는 없었다. 물개와 여러 다른 여행지 중에 선택을 해야 했는데, 우리의 선택은 물개였다. 여우와 고래 등 야생동물들이 너무 인상 깊었던 탓인 것 같다. 우리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대자연을 선택한 것이다.
여러 여행지를 포기하고 물개를 선택한 만큼 물개를 꼭 봐야 했다. 늦게 가서 물개를 볼 수 없게 된다면 정말 낭패였다. 7시가 조금 넘어 출발했다. 소요시간은 대략 40분. 어제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다 남쪽으로 반도를 가로질러 내려가는 54번 국도를 타고 이동했다.
이동하는 중 길 바로 옆에 주상절리 기둥이 늘어서 있는 지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냥 방치해두고 있다. 그냥 흔해빠진 바위마냥. 뭐지? 이 정도는 관광자원으로 활용도 안 한다. 대자연의 축복을 받은 아이슬란드의 위엄이랄까!
대략 아침 8시쯤에 이트리툰가에 도착했다. 공터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서식 중인 물개에 대한 안내표지판과 서식지 보호를 위한 자발적 주차비 납부, 물개 보호를 위한 조용한 관람 협조 등에 대한 안내문이 있었다. 조금 걸어 들어가면 모래사장이 펼쳐진 해안이 나오는데 해안가에는 바위가 ‘ㄷ’ 자 형태로 분포해 있어 물결이 잔잔하다. 그 바깥쪽으로는 제법 거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모래사장을 조금 내려가니 듬성듬성 물에 떠 있는 해안가 바위가 비교적 가깝게 보이기 시작했는데 바위 중 한 곳에 물개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우와~~ 성공이다. 물개를 바로 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대략 10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이트리툰가에 아침에 오기로 한 건 정말 기막힌 선택이었다.
물개를 보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물속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이미 요쿨살론에서 많이 보았던 것처럼 머리만 빼꼼히 내민 물개가 적어도 우리 주변에 10마리 이상은 있었다. 그중 두 마리가 바위 위에 올라와 있는 물개 쪽으로 이동해 왔다. 얘들도 물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닐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바위 근처에 와서는 멈춰 버린다. 조금 더 관찰했지만 움직임이 없었다. 둘째와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려고 반대편 해안가로 가보기로 했다. 그곳에도 머리만 빼꼼히 내민 물개가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대략 100미터가 안 되는 크기의 모래사장 끝부분까지 가 봤지만 밖으로 나와 있는 물개는 없었다. 다시 되돌아왔는데, 이럴 수가! 물개 한 마리가 더 밖으로 나와 바위 위에 올라 있었다.
우리가 반대편으로 간 사이 올라왔다는 것이다. 첫째 조카는 물개가 나오는 걸 보고 우리를 부르고 싶었지만 큰 소리를 내서 그들을 방해할 수 없어서 우리를 부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뒤돌아 보면 막 손짓해서 부르려고 했다는데 우리 둘은 물개가 다 올라올 때까지 뒤돌아 보지 않았다. 이렇게 아쉬울 수가. 물개가 바위에 오르는 희귀한 장면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는데! 물개는 둥그런 몸통에 지느러미처럼 생긴 발이 달린 게 전부이다. 도대체 저런 몸으로 어떻게 바위를 올라갈 수 있는지 너무도 신기한데, 그걸 직접볼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놓쳐버린 것이다. 그 장면을 생생히 지켜본 첫째가 너무 부러울 따름이다. 역시 사람은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바위 근처에 다가왔던 다른 한 녀석도 혹시 올라오지 않을까 해서 계속 기다려 봤지만 그 녀석은 끝내 망부석이 되어 움직이질 않았다.
아침시간에만 물개를 볼 수 있다는 건 이 녀석들이 곧 바다로 들어갈 거란 말일테니 우리는 그만 이들과 작별하기로 했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다 조카가 고래뼈를 발견했다. 고래 한 마리가 그냥 거기 놓여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였던지 해안가로 떠밀려 온 고래가 거기서 죽어 뼈만 고스란히 남긴 것 같았다. 수십 년쯤 되었을까?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빙하와 주상절리, 그리고 오래된 고래뼈까지 켜켜이 쌓인 시간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아이슬란드 여행이 가진 수많은 매력 중 하나이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 대자연을 만끽하던 9일간의 대장정이 이제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우리의 다음 일정은 게르두베르그 절벽이다. 이 절벽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주상절리가 마치 성벽처럼 길게 늘어서 장관을 연출한다.
아이슬란드에서 흔한 게 주상절리이지만 이곳은 그중에서도 규모로만 보았을 때 둘째가라면 서러울 녀석이다. 이곳에는 주차장 같은 건 없다. 길게 늘어선 주상절리를 따라 길이 나 있는데 길옆에 적당한 공터에 주차를 하면 된다. 길에서 주상절리 까지는 직선거리로 대략 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데 야트막한 언덕을 걸어 올라가면 바로 주상절리 아래까지 갈 수 있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사진인데 여기서는 사진 찍기가 참 애매했다. 전체적인 모습을 다 담기도 힘들고 일부분만 찍자니 이 절벽의 느낌이 제대로 나지가 않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인간이 개발한 참 간단한 방법이 있다. 바로 내 마음속에 저장! 역시 우린 못할 게 없다. 사진 촬영의 또 다른 문제는 날씨였다. 추위가 만만치 않았다. 사진 찍으려고 주머니 밖으로 손을 꺼내기만 해도 손이 얼어 터질 것 같았다. 이른 아침 이트리툰가에서도 그 정도는 아니었고 이날 오후에는 훨씬 남쪽이긴 했지만 따뜻하기까지 했었는데 여기서는 왜 그렇게 추웠는지 의문이다. 절벽이 멋지긴 하지만 절벽 앞으로 펼쳐진 평야 지대도 풍광이 탁 트여 시원한 전경이 펼쳐진다.
그 사이에 제주 오름처럼 혼자 볼록 솟은 봉우리 하나가 풍경을 다채롭게 한다. 그 위에 올라 바라보는 풍경이 얼마나 멋있을지는 상상 속에 남겨두고 길을 나선다. 게르두베르그 절벽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대자연을 떠나 문명의 세계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