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볼까요, 아이슬란드? - 여행 9일 차
숙소로 돌아오니 체크인이 가능한 2시까지는 여전히 30분이 넘게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비밀번호를 미리 문자로 받아서 키박스에서 열쇠를 찾아 들어가는 무인체크인 시스템이라 안으로 들어가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드디어 화장실을 해결을 했다.
들어온 김에 식사까지 해결하기로 했다. 사흘 전에 구입했던 식재료 중 고기만은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요리사 막내가 또 한 번 실력 발휘를 했다. 배불리 먹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식재료는 많았다. 다시 시내에 나가면 핫도그월드에도 가야 했으니까 남아있는 식재료 중 대부분은 먹지 못할 것이었다. 별 수 없었다. 게스트하우스 냉장고에는 누구든지 먹으라고 남겨두고 가는 식재료가 종종 있는데 우리도 누군가 필요한 여행자에게 주고 갈 수밖에 없었다. 저녁과 내일아침에 먹을 계란, 과일, 치즈 등 간단한 식재료 몇 개만 남겨두고 쇼핑봉투에 담아 공짜라고 써서 냉장고에 넣었다. 누군가 잘 먹었기를 바란다.
식사를 끝내고 짐정리를 했다. 차에 널브러져 있는 짐을 정리하려면 일단 다 숙소로 옮겨야 했는데 내가 그만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 막내가 기념품으로 산 스노우볼이 깨지지 않도록 수건으로 잘 싸놓았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수건을 들다가 스노우볼을 바닥에 떨어뜨려 버린 것이다. 와장창 박살이 났다. 이걸 어쩐다? 시내에 기념품 가게가 많았지만 같은 걸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막내가 아주 맘에 들어했었는데. 일단 저녁에 다시 나가서 기념품 상점을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묶었던 방은 큰길 쪽이 아니라 건물 뒤편쪽 방이었는데 숙소 건물 뒤는 재건축을 하느라 건물이 없었고 그 뒤쪽으로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우리가 바라보는 쪽은 역시 그 건물의 뒤쪽이었는데 그 건물에는 그라피티가 여럿 그려져 있었고 그중에는 꽤 근사해 보이는 작품도 있었다.
시내 관광을 하기 위해 나오다가 복도에서 베란다로 나가는 문이 있길래 그라피티를 자세히 보려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둘러보고 다시 들어가려고 하니 문이 밖에서는 열 수 없는 구조였다. 우리는 바깥에 갇혀 버렸다. 외부인 출입을 막기 위한 것인가 본데, 우리처럼 처음 와서 그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떡하라고! 나선형 철제계단이 있어서 1층까지 내려갔지만 1층에는 쇠창살로 둘러 쌓여 있어서 나갈 수가 없었다. 여행의 묘미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결국 막내가 또다시 해결사로 나섰다. 2층 베란다 난간에서 쇠창살을 타고 넘어가 약간 내려간 다음 뛰어 내려서 밖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는 건물옆으로 난 큰길로 나가는 통로를 통해 나가 정문을 통해 건물로 들어와서 우리를 구해 주었다. 막내가 맹활약을 이어갔다.
탈출에 성공했으니 다시 즐기러 가야 한다. 숙소 바로 옆에는 아이슬란드 외무부 청사가 있었고 거길 지나 이미 한번 다녀간 길을 따라 다시 할그림스키르캬로 갔다. 하지만 똑같은 길로 가지는 않았다. 전망대에서 주변 길을 대충 다 파악을 해놓았기 때문에 다른 골목을 구경하며 갔다. 골목을 지나가고 있는데 작은 골목 안에 뚱냥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아이슬란드 고양이들은 대체로 얼굴이 동그란 게 예쁘게 생겼는데 이 녀석은 거대한 몸집까지 더해져 눈에 확 띄었다. 그런데 이 녀석 쇼맨십이 대단했다. 자기를 보고 즐거워하는 우리를 보더니만 거만한 자세로 느릿느릿 걸어오더니 우리 앞에 쓱 눕는 것이다. 마치 ‘아, 이놈의 인기는. 그래, 그래, 내가 한번 만지게 해 준다!’ 하는 것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랑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능숙하게 쓰담쓰담 타임을 제공하고는 한 2~3분 있다가 우리를 한번 쓱 처다 본다. 그러고는 이제 그만하는 것처럼 또 본래 자기가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느릿느릿 여유롭게. 거만한 녀석 같으니라고!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고!
시내투어는 다양성을 상징하는 무지개 거리가 첫 번째 목적지였다. 아기자기한 건물과 예쁜 카페, 다양한 기념품 가게가 들어선 레이캬비크 관광 1번지이다. 한국사람들에게 유난히 인기가 많은 음반가게가 있어 들어가 보았다. 노래를 신청해서 들을 수도 있다 했지만 처음부터 구입할 생각이 없었던지라 이것저것 음반만 뒤적이다 나왔다. 예쁜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내 등 뒤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어서 나도 자연스럽게 뒤돌아 보았는데, 순간 ‘오~~’하고는 감탄하게 된다. 언덕 위로 이어진 무지개거리 끝에 할그림스키르캬가 우뚝 서 있다. 기가 막힌 구도에 거리의 색감까지 더해져 별 볼 일 없는 솜씨에도 사진이 예쁘게 나온다.
무지개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 비교적 큰 도로가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아이슬란드 총리 관저가 나온다. 일단 삼엄한 경비가 없는 데다 수수한 모습이어서 신선하다. 조금 더 가면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는 조그만 언덕이 있는데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거기서는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하르파가 지척이다. 하르파는 레이캬비크에 있는 공연장이자 컨벤션 센터인데 주상절리 모양의 육각 유리 외벽이 아름다워 유명한 곳이다.
잠시 둘러보고 나와 그토록 기대했던 핫도그 월드로 향했다. 한국인 여행자 중 과연 이곳을 빼먹는 사람이 있을까? 한국에 아이슬란드 여행 열품을 불러온 꽃보다 청춘 아이슬란드 편에서의 눈물겨운 핫도그 주문은 이 가게를 순식간에 모든 여행자들의 버킷리스트에 넣어버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원래는 맛으로 유명한 가게라고 하지만 한국인들에겐 성지순례 같은 필수 코스가 되어 버렸다. 가게는 사거리 귀퉁이의 조그만 광장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작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핫도그를 만들고 광장에 앉아서, 혹은 서서 먹을 수 있는 벤치와 테이블이 몇 개 구비되어 있었다. 가게에는 사람들이 대략 10미터가량 줄을 서 있었는데 이 줄은 내가 서서 기다리다 주문하고 받아서 근처 테이블에서 다 먹고 자리를 뜨기까지 거의 계속 이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손님이 계속해서 몰려들었는데, 저 정도면 사장은 떼돈을 벌겠다 싶지만 일하는 점원들의 영혼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동공이 풀린 눈으로 거의 기계적으로 핫도그를 만들어 내놓고 있었다. 그럼 맛은? 좋다. 사실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이 아닌가!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핫도그를 바라보는 바로 옆 피자가게 사장님의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보였다. 대형 홀을 갖춘 그 가게에는 우리가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그 피자가게를 따라 쭉 내려오다 보면 공원과 뭔지 모를 관공서 느낌이 나는 건물이 나오는데 그 관공서를 지나가면 티외르닌 호수가 나온다. 좀 전에 관공서 느낌이 나는 건물 건너편에 티외르닌 호수와 맞닿은 건물이 레이캬비크 시청인데 관공서 느낌의 건물들이 시청 별관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티외르닌 호수는 서울의 석촌호수 정도 되는 규모의 호수인데 호수를 둘러싸고 국립미술관과 국립박물관이 위치한 레이캬비크 시민들의 휴식처이다. 호수에는 오리와 백조가 한가로이 헤엄치고 동네 아이들은 익숙한 듯 먹이를 주며 교감한다. 하늘에 서서히 노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느긋한 오후를 보내며 얼마 남지 않은 여행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