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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04. 2023

사랑의 형식

에세이

사랑의 형식이 있을까? 나는 진작에 사랑에는 어떠한 뚜렷한 형식이 없다는 걸 알았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식의 사랑이 있고 그 형식은 어떤 식으로든 사랑으로 불린다고 알게 됐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내가 엄마와 둘만 있는 한부모 가정이었기 때문일 거다. 나는 단란한 4인 가족의 형태와 우리 가족이 다르단 걸 일찍이 알아채버렸고 나는 거기서 형식의 다름을 은연중에 알게 됐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의 사랑은 이상한 형식의 사랑이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나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린 나는 한 번은 지나치며 물어볼 법한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이런 사랑의 형식을 나는 당연하다고 느꼈다.


시간이 지나 가정을 꾸릴 시기지만 아직은 두려운 나이가 됐다. 딱 엄마가 나를 낳았을 즘의 나이가 되면서부터 나는 진지하게 가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한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엄마 나이 스물아홉에 나를 낳았으니 그때 당시로서는 좀 늦은 편이기도 하다. 현재로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아무튼 나의 가정에 대한 질문은 곧 사랑의 형식에 대한 질문이었다. 자식으로서 경험한 사랑은 그 형식에 의문문을 달지 않았지만 내가 부모가 된다면 그 형식에 의문문을 달게 되는 걸 알았다. 나는 내 아이가 나처럼 성장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분명히 어른이 된 후엔 이해하기 마련이지만 그 당시에는 받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상처를 부러 받지 않기를 바란다. 사실 자식보다 부모가 사랑의 형식에 바라는 게 더 많은 거 아닐까? 란 질문을 하게 된다.


자식은 선택과 자신의 노력 여하와 상관없이 부모로부터 사랑(상처)을 받는다. 하지만 부모는 선택과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자식에게 사랑(상처)을 줄 수 있다. ㅡ불가항력적인 선택과 환경도 분명 있다ㅡ 부모는 자녀에게 세계를 소개하는 가장 처음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최대한 나은 방식의 사랑의 형식을 보여줄 의무가 있다. 의무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부모의 최선의 선택지인 게 분명하다.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


사랑은 분명 죄가 아니다. 사랑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겠는가? 자녀 역시 분명 나이가 들어 부모를 이해할 것이다. 자녀는 어른이 되어 부모 역시 나와 같은 서툴고 어설픈 인간이란 것을 알게 되고 그들이 나에게 세계의 전부였지만 이제는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자신의 일부를 부정하면서 까지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고 감정의 영역에서 이해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용서하고 한편으론 유기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부모를 저주할 것이므로) 하지만 부모는 언젠가 반드시 자신이 지키지 못한 순간들, 그리고 자신이 내어줬던 상처, 자신이 보여준 사랑의 형식에 대해 분명 후회할 것이다. ㅡ일반적으로는 그렇다고 믿는다. 아닌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ㅡ


우리 엄마는 항상 나에게 죄스러워한다. 자신이 보여준 사랑의 형식이 최선이었는지 늘 의문하므로. 나는 그 형식에 의문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내가 부모가 될 나이가 되고 나니 사랑에는 어쩌면 형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 수록 보수적으로 변한다더니 그게 사실인 것 같다. 그 사랑의 형식이 뭔지는 잘 모르면서 괜히 그 형식에 집착하게 된다. 심지어 당장 자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생각해 보면 그 형식에 대한 집착은 나의 욕심인 것 같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에게 가지는 욕심은 원래 무한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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