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훈 Sep 25. 2022

낯설게 깨어진 틈 사이로

에세이

요즘 새로 생긴 습관이 있다. 이사를 한 집은 샤워부스가 있어서 물때가 잘 생기지 않으려면 관리를 열심히 해줘야 하는데 샤워 후 매번 사방으로 튄 물들을 스퀴지로 모아 배수로로 밀어내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의도치 않게 매일같이 샤워부스 벽면과 불투명 유리문을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기고 말았다. 하루에 적어도 한 번은 샤워를 하게 되는 샤워부스 안에서 나는 거의 매일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희한한 경험을 한다. 분명 어제 보지 못한 검은 때가 있다거나 살짝 긁힌 자국이 있다거나 아니면 아예 금이 가 있다거나. 재미있는 건 이 습관이 생긴 후 거의 매일 낯선 흔적들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익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낯선 경험들.


 3,4년 전 내가 스타벅스에서 일할 때 나는 한 친절한 중년 남성과 친해졌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나타나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설탕을 하나 받아갔다. 대부분의 바리스타가 그렇듯. 나는 그렇게 낯선 중년 남성의 모닝 루틴에 끼어들게 되었다. 그와 나는 종종 인사를 했다. 낯을 가리는 나는 고객과 친해지는 게 어려웠지만. 그 남성은 나에게 친절했고 우리는 가끔 농담을 할 정도로 친해졌다. 그와 나의 수다 시간이 관리자의 눈에 거슬릴 정도로 길어졌을 즘이었다. 그는 나에게 책을 한 권 권했는데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나는 어쩐지 그와의 인연을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가진 감상적인 태도 때문이었을까? 나는 며칠 뒤 곧장 여의도의 서점에서 그 책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와 읽었다. 그와 나는 더욱이 친해졌고 그 중년 남성은 가끔 간식거리도 주고 갈 정도였다. 그는 젊은 청년을 보며 자신의 지나간 청춘을 돌아보고 그 청년에게 기운을 북돋아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관계가 유지되던 때에 문제가 발생했다. 내 앞에서 아메리카노에 설탕을 풀고 스틱으로 젓던 그가 느닷없이 내게 자신의 정치성향을 밝혔다. 나는 당황해서 웃으며 넘겼다. 친절하고 웃음이 많던 한 중년 남성이 돌연 낯설게 느껴졌다. 그와 나 사이에 작은 틈이 발생했다. 우리 각자의 정치성향의 간극이 서로를 낯설게 만들었을까? 그와의 수다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의 모닝 루틴에 내가 간섭하는 일이 점점 줄었다. 나는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한다. 그가 대체 왜 내게 그런 말을 한 걸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이 낯선 틈새를 만든다. 그리고 그 틈새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서로를 반목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폭력에 이르기까지 한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틈새를 찾아서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려는 일이 잦아진 것만 같다고. 나 역시도 그런 종류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때 그가 내게 했던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이후에도 있었던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내가 그런 틈들을 모른 채 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그 틈들을 애초에 몰랐더라면. 그러나 내가 매일같이 샤워부스에 들어가 습관을 들인 것처럼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마주해야 하고 좋든 싫든 그 낯설게 깨진 틈 사이로 삐져나오는 무언가를 평가하는 습관이 생겨버린다. '이 틈은 나를 언제가 성가시게 만들 거야.' '이 검은 때는 지워버리고 싶어.' 이런 생각이 드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것을 퍽 슬프게 생각한다. 너무 감상적이지 않으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조금 슬픈 일이지 않은가? 만약 그 대상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건 더욱 슬픈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낯설게 깨어진 틈 사이로 무언가가 삐져나온다. 타자에 대한 이해를 무너트리는 그 무언가가. 그 검고 흉측한 것이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아마 평생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이해 불능. 그것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이전 03화 나의 중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