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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Oct 02. 2022

물려받지 못한 가부장제

에세이

가부장제, 현대사회에서 가장 흉측한 단어 중 하나. 나는 가부장제를 물려받지 못한 남성이다. 흔히 말하는 ‘아비 없이 자란 놈’ 중 하나인 셈인데 동의어로는 후레자식이 있겠다. 나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낮춰서 부르고 불쌍하게 만들어 동정을 얻으려고 이런 이야기를 시작한 건 아니다.


 나는 항상 '아버지', '가족'에 대한 텅 빈 공허감을 느끼는데 그곳은 나에게 완벽한 무지의 공간이어서 내가 가장 또는 아버지가 되었을 때를 상상하기란 사실 매우 어렵다. 사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끙끙 앓고 있는 거에 비하면 나는 타인과 이런 대화를 한 적이 거의 없다. 어째서일까? 나는 신앙심이란게 있었던 어린 시절, 교회에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얘기를 한 것을 제외하면 타인, 아니 유일한 가족 어미니와 조차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신기하게도 나는 아주 어린 나이임에도 잘 알고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 부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죄악이다.’ 친지들이 모인 자리 나 할머니 앞에서 그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 자리에 불려 들어올 슬픔에 대해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알았던 것이다. 모르는 척, 장난인 척 아이라면 응당 그랬을 수도 있을 순수해질 수 있었던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나는 단 한 번을 묻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인간과 거의 완벽히 닮은 AI 로봇 데이빗을 만든 웨이랜드 사의 회장 피터 웨이랜드는 한 행성에 인류를 창조한 창조주를 만나러 가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는 마침내 창조주 앞에 서서 당당히 영생을 요구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황제 앞에서 적법한 황위 계승권을 요구하는 황태자처럼 보인다. 재미있게도 피터 웨이랜드에게는 혈육인 딸(비커스)이 있지만 혈육인 딸보다는 자신이 창조한 '데이빗'을 친아들처럼 아끼는 모습을 보이고 데이빗 역시 회장을 자신의 '아버지'처럼 여기고 웨이랜드의 적법한 계승자가 자신(혹은 더 나아가서 창조주의 적법한 계승자)이라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껏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신화들은 대부분 인류의 기원을 찾는 곳에 반드시 어떠한 이상적인 남성의 모습을 가져다 전시했다. (프로메테우스ㅡ에일리언 시리즈ㅡ는 그것을 완벽히 비꼬고 있는 이야기이다.) 장자 계승의 흐름은 가부장제에서 매우 중요하다. 내가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가진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경험적으로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가 없었고 양육을 받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에서 세습되는 가장의 형태가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살아가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만드는 것만 같다. 나는 자연스럽게 사회에 나뒹굴고 있는 가부장제의 유산들을 하나씩 주워서 대체제로 만들려고 했다. 그럼에도 어떠한 공허함이 있었다. 아버지라는 것은 이상적인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물려받지 못한 가부장제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갖지도 못하는 것에 애착을 가진다니. 재미있는 일이지 않은가?


 어째서 아버지는 엄격하고 이상적인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일까? 아마 거의 6000여 년의 시간 동안 가부장제라는 기둥 위에 살아온 인류의 관습과 문화 때문이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의 기원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인류사에서 영원히 반복되는 원형 중에 하나이다. 와중에 우리는 당연히 자신의 부모를 지목할 수밖에 없고 남성은 자신의 아버지를 여성은 자신의 어머니를 기원으로 지목하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관습적인 문화 속에 우리는 학습되어 살아왔을 뿐. 나의 상실감 역시 그런 것이다. 어찌 보면 나는 자신의 기원을 잃은, 길을 잃은 남성처럼 보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제 나는 애초에 물려받지도 못한 가부장제에 집착을 버리려 한다. 나는 리들리 스콧 감독처럼 위대한 예술가가 되거나 가부장제와 맞서 싸우는 운동가가 될 생각은 없다. 단순히 내 삶에서 물려받지도 못한 가부장제가 퇴장해주길 바랄 뿐이다. 당연하게도 그 몫은 나에게 달려 있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느 날 쉽게 성공한 금연처럼 내 삶에서 자연스레 잊힐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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