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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Oct 14. 2022

가능성의 바다

에세이

칠흑 같은 바다가 나와 당신의 유전과 모든 생명의 시작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진해 앞바다에 작은 낚싯배를 띄워 사촌들과 그 작은 바다(태평양에 비하자면) 위를 동동 떠다녔었다. 낚시는 어른들의 일이었고 나 같은 애들은 바닥에 뒹구는 불가사리나 구경하는 게 일이었는데 나는 그 징그러운 불가사리에 손 한 번 덴 적이 없었다. 바다가 낳은 못생긴 조약돌 같이 생긴 그 녀석이 햇빛에 따갑게 말라죽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배 안의 그 누구도 그 일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배 안의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채빌 하는 즈음 저물어 가는 태양 아래 건조한 바닷바람은 마치 사막 같았다. 나는 뱃멀미도 심해 꽤나 지쳐버렸다. 나는 그 좁은 선실 한편에 누워 파도에 맞춰 출렁거렸다. 나는 곧 고통을 잊기 위해 선잠에 들어 꿈과 현실을 오갔다. 


 술잔이 출렁거렸다.


 이십 대의 후반 나는 어느 극단에 들어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극단에 들어갔단 건 내가 극단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연기를 배우고 대본을 해석하고 블로킹(무대 위에서 동선 따위를 짜는 일)을 했다. 잠시간 행복했다. 극단 사람들은 술자리를 좋아했다. 연습이 끝나면 늘 술자리를 가졌고 술자리를 기피하는 내게 그 일은 반쯤 고역이었다. 배우들을 만나보면 알겠지만 그들은 자신의 일에 매우 열정적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만큼의 열정을 살면서 가져본 적이 없으니 그들을 실눈 뜨고 본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무시한 것도 아니었고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한 적도 없었다. 그들이 가진 연기와 술에 대한 투혼은 아주 대단했다. 둘 다에 진심이 아닌 나는 그 자리에서 조금 유별난 인간이었다. 나는 맨 정신으로 그들의 예술적 고뇌, 삶의 번뇌를 지켜봤는데 대부분이 고역이었던 그 술자리의 유일한 낙이었다. 마치 마취를 끝낸 환자를 지켜보는 의사의 마음으로 나는 그들을 관찰했다.


 꿈과 눈물이 출렁거렸다.


 가능성의 바다는 모든 꿈의 요람이다. 칠흑 같은 세계에 꿈을 꾸는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신의 꿈을 위해 몸과 정신을 모두 투기하는 배우들의 사이에 있노라면 금세 당신의 마음도 뜨거워질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의 바다는 사막과 같다. 당신은 망망대해 위에서 작은 선체 위에 몸을 맡긴 채 떠다닌다. 때론 폭풍우를 맞고 때론 구호를 받고 때론 난파되어 육지로 돌아가 다시 항해를 준비한다. 그러나 가능성의 바다에서 가장 위험한 시기는 바로 어디에나 차오른 물 위에서 따가운 햇빛을 맞으며 타들어가는 것, 메말라 가는 것 그때이다. 가능성의 바다는 길을 잃기가 쉽다. 분명 지도 위의 한 점을 맴돌고 있음에도 전진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그런 일이 참 많다. 술자리는 감정의 격화가 번번이 일어나는 곳이지만 나는 매번 거기서 그들의 부랑을 보고 있자면 늘 가슴 한편이 쓸쓸해졌다.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이 일면 늘 자리를 벗어나 주점 앞에서 담배를 물었는데 나를 쫓아 함께 담배를 무는 그 모습들까지 나는 참으로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 꿈꾸는 자의 자격을 얻었기에 그것에 꽤나 감사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극단 생활을 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다른 가능성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들 중 누군가는 여전히 그때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처럼 다른 바다를 찾아갔을 것이다.


 날이 쌀쌀해지면서 금연에 실패했다. 우중충한 주광색 가로등 아래에서 담배를 물면 가끔 그때가 생각이 난다. 오래된 기억도 아닌 그때가 벌써 이만큼이나 희미해져 간다. 칠흑 같던 한밤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꿈을 논했던 이들이 어처구니없게도 그리울 때가 있다. 그때 세계는 희미해졌었고 꿈만이 출렁거렸다. 우린 가능성의 바다에서 메말라 죽는다 해도 좋아라 했었다. 신기하고 우스운 한때였다. 이른 아침에 술자리를 파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한 뒤 나는 가능성의 바다 한가운데서 선잠에 들었다. 나는 그날 불가사리이기도 해파리이기도 갈매기이기도 했다. 그때의 바다는 이제 더 이상 항해할 일이 없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다른 바다 위에서 고통을 잊기 위해 선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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