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

24년도 일기

by 와온

이번 학기는 그에게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는 위원장을 맡아 수백 명의 사람을 매일같이 마주했다. 타인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에너지가 빠지는 지경이었다. 길을 걷다가도 혹여나 자신을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봐 가슴이 답답해지고 입술이 떨렸다. 그런 증상을 겪은 뒤, 의사의 권유로 방학 동안에는 사람을 마주하지 않기로 했다. 봄부터 여름까지 겪었던 정신적 압박감은 한계를 넘어섰고, 하루하루가 깨어있는 악몽이었다. 잠자는 순간만이 그 악몽에서 벗어나는 시간 같았지만, 그마저도 너무 짧았다.


타인으로부터 멀어지는 시간을 가지기로 한 후로도 그는 매 순간 떨리는 눈과 입술이 제정신을 찾기만을 바랐다. 결국, 그는 모든 연락을 끊었다. 인간관계는 그에게 더는 위로가 아닌 부담으로 다가왔고, 치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유일한 안식이었다. 얼마간 듣지 못했던 음악을 헤드폰을 끼고 들으며 누워있는 시간만큼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매일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그는 둔탁한 드럼 소리를 듣고 병사들의 행진을 그려보았다. 둠둠둠둠, 정확한 규칙에 맞춰 언덕에서 행진하는 병사들의 발맞춤에 머릿속 메트로놈도 움직인다. 평소에는 따로 움직이던 머리와 심장이 이 순간만큼은 천천히 일관되어 간다. 발맞춤은 일관되다가도 8번, 혹은 16번 일정 호흡을 채우는 순간, 챙!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일정한 박자와 악기 소리, 그 뒤에는 멜로디와 목소리가 겹쳐진다. 감미로운 팝송 멜로디는 그가 저절로 음악에 몸을 싣는 데에 도움을 준다. 목소리는 사랑과 고독을 동시에 말하는 가사가 함께한다.


처음 5초 동안은 음악을 듣는다. 발자국, 호흡, 몸의 흐름, 상상과 같은 심상들이 슥-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결국에는 다 잊고, 자연스럽게.” 이전에 그를 가르친 구루가 말해준 대로 다 잊고 다시 5초간 음악에 빠져들고자 한다. 병사들의 발걸음, 머릿속 메트로놈은 움직이고, 감미로운 멜로디와 겹쳐지는 목소리. 그는 순간 잠에서 깨어난 한 마리의 동물이 되고자 한다. 침대 위에서 몸을 움직인다. 천천히 움직인다. 오른쪽 팔을 들고 왼쪽에서 대각선 아래로. 발은 드럼 소리에 맞춰 제일 자연스러운 리듬으로 앞발을 들고, 뒷발을 축으로 비틀어 몸을 일으킨다. 차차 익숙해져 가는 메트로놈에 발자국은 항상 밟던 길을 향해 간다. 헤드셋을 통해 흐르는 음악이 차차 발과 손끝에서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빠져든다. 잠겨든다. 그는 음악이 턱밑까지 차올라 넘쳐흐르는 중이다. 곧장 잠길 것만 같고, 허우적대는 양손과 발이 헤엄치는 것만 같다. 헤드셋 밖의 소리는 환호인지, 박수인지 들리지 않고, 그저 음악과 함께 꼬인 외부의 방해물질과도 같다. 자연스럽게 몸속에 흘러들어오거나, 그렇지 못한 소리는 자연스럽게 튕겨져나간다.


상상한다.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둥글게 앉아 그를 보고 있다. 그는 이를 인식하고 들어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스무 명은 그와 외부세계를 구분 짓는 원형의 경계일 뿐, 그 안의 공기는 외부의 것과는 다르다. 음악에 잠수한 몸이었기에 조금씩 호흡이 가빠진다. 호흡을 한 번 들이마시고 반대 방향으로 몸을 비튼다. 다시 한 번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반대 방향으로 비틀어 돌아 정면을 바라본다. 눈앞에는 침대가 있는 듯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춤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는 ‘동양의 오래된 용’이 되고자 했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그런 영감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았다. 이전에 어떤 댄서가 용의 모습을 상상하며 춤을 춘다고 한 인터뷰 영상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잔잔하던 멜로디가 순간 다르게 들리기 시작한다. 뒤에 감춰진 빠른 드럼 비트가 이제야 들리기 시작한다. 생각한다. 더 빠른 몸짓이 필요하다. 두두두쿵, 두두두쿵. 몸에 피가 돌고 더 빠른 무릎과 동작. 순간, 내 몸속에는 악마의 피가 흐르며 천사의 손짓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여백을 쓰다듬는다. 스피커에서 강렬한 소리가 나오는 순간 등줄기의 땀이 느껴지고, 손끝부터 등목까지 털이 솟는다. 고도의 몰입 상태에 다다르면 상상한 것의 질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온몸이 피부가 바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깨가 둥글게 말림과 동시에 손바닥이 뒤집힌 채로 골반, 허리, 등을 따라 회전한다. 뻗는다. 뻗는 것이 느껴진다. 날고 있는 것인가 싶어 고개를 아래로 돌려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기 시작한다. 나는 구름 위에 있다. 틀림없다. 나는 구름 위에 있어 어지러이 돌고 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은 구름 혹은 수증기 같다. 음악이 서서히 조용하게 끝나고, 내 공간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원형의 경계는 관객이 되고, 내 눈은 거울 속 그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스르르. 돌아온다.


그는 마치 꿈속에서 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 돌아온 곳은 더는 악몽이 아니었다. 유일한 안식처이자,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기에 그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침대에 누워 음악을 다시 들으며, 그는 오늘 춤을 추었던 순간들을 천천히 되새겼다. 그의 눈과 입술은 더는 떨리지 않았고, 대신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며 얼굴엔 붉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 그는 오랜만에 자신의 몸이 살아있음을 온전히 느꼈다. 다시금 세상과 마주할 힘을 조금씩 되찾아가는 자신을 깨달으며, 그는 비로소 평온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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