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안. 옷차림도 생김새도 제각각이지만, 사람들은 비슷한 자세로 비슷한 크기의 화면만을 바라본다. 저기 노약자석 구석에 앉아 계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실룩이는 미소와 천천히 깜빡이는 눈가, 축 처진 주름 속에서 그들의 삶이 엿보인다. 그 삶은 분명 행복이었다. 자신의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매끈한 화면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의 주름은 지하철 안에서 가장 생생한 파도처럼 보였다.
집 앞 놀이터에는 플라스틱 기구들이 고무매트 위에 형형색색, 옛날에 이곳을 뒤덮던 모래사장과 철봉들로 이루어진 위험한 것들은 사라지고 밝고 낮은 것들이 가득하다. 아이들을 위해 이곳은 높이차나 단차도 모두 안전을 우선시해 설계되었고, 무엇 하나 날카롭지 않고 둥글게 만들어진 놀이공간이다. 안전지대 속에 놀고있는 저 아이는 귀엽지만, 그 모습이 어딘가 아쉽기도 하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 또래친구들은 학원에 갔는지, 아이는 엄마와 단둘이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낸다. 어쩐지 한국 사회의 단면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요즘 점점 연락처에서 사라져가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사회적인 고독을 느끼고 있다. 청년고독사가 증가한다는 문제를 담은 뉴스가 생각난다. 우리나라의 자살율은 항상 높았으며, 1인 가구의 수, 미혼의 수, 미취업자의 비율이 늘어간다고 한다. 요즘 청년들은 연애를 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시야는 내가 보고싶지 않아도 미디어에서 나에게 보여주는 객관적인 시각이기에 나와 같은 젊은 청년들은 이를 공유할 것이다. 같은 불행을 공유한 우리들의 처지는, 내 하루가 비관적인 이유와 내가 지금 당장에 불만족스러운 이유를 짚어주는 무당 앞에 놓인 아프지 않은 환자와도 같다. 나는 다시 퀘퀘한 눈을 도파민을 주는 화면 앞에 가져다 놓는다. 지하철에 앉아 이런 모든 것을 알려주는 화면을 마주할 때면, 어릴 때 보던 공상과학영화가 이미 내 눈앞에서 재현이 되는 것만 같다.
우리는 촉각을 잃어버렸다. 촉각을 되찾는 방법. 사람의 몸을, 얼굴을, 손바닥을 만져라. 우리는 뽀얀 살결, 부드러운 살결을 잃어버렸다. 더이상 피부로 대화하지 않고, 입으로 먹지 않고, 그저 빛을 내뿜는 덩어리 앞에 자신의 눈을 가져다 놓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손가락 끝 마디만 있으면 된다. 손가락 마저도 두 개면 충분할듯하다. 이제 당신은 모든 시각적, 청각적 감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대기술은 이 두 감각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더 현실감있게- 를 벗어나 더 자극적이고, 말도 안되는 경험마저 무지개 빛깔로 만들어낸다. 여기에 노이즈 캔슬링을 더해, 우리는 모든 일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청각적 신세계를 경험하기 너무도 쉽다. 현실의 색을 잃어버린 소리 없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간다.
영화 '매트리스'에서는 가상세계의 당신의 감각을 지배하고,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도 사람들은 촉감 영화를 통해 쾌락을 느낀다. 미래를 그리는 공상과학에서는 현대인들은 주체적인 감각을 잃어버릴 것으로 본다. 영화 기생충에서는 CG로 부유한 저택을 만들어내서 관람자들에게 시청각적인 부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하실, 반지하집, 화장실은 실제로 만들어내지 않고는 가난의 감각을 표현할 수가 없다. 반지하 화장실의 냄새, 눅눅한 빗물, 소독차의 냄새는 화면을 뚫고 나와 우리에게 가난을 전달한다. 영화에서는 계급을 나누는 요소로 사용되지만, 우리는 가상의 것이 아닌 진짜 삶을 피부로, 전의식과 무의식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매끈하고 군더더기 없는 허상의 것을 좇지 말아라. 당신이 직접 느끼는 손길이나 피부, 온도, 상처가 당신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감각을 찾고 싶다. 브라운관 티비에서 나오는 치지직거리는 느낌은, 혹은 필름 카메라에서 빛이 바래가며 그을린, 노이즈처럼 흐린 그런 기억과 감각은 결국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드는 건 이런 아날로그의 감각들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따뜻하고 흐린 감각을 마주하며 살고 싶다. 우울감 가득한 매끈한 화면속에서 벗어나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