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좀 사주죠"
"이지안 입니다"
지안과 동훈의 첫 만남이었다.
21살 청춘과 45살 중년.
로맨스보다는 인간애에 가깝다. 사람을 통해 위로받고, 사람 때문에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이야기다.
띠동갑을 두 바퀴 돌아야 하는 많은 나이차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별도 살아온 환경도 다르지만 서로가 불쌍한 사람임을 알아본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 외로운 지안. 커피로 끼니를 해결할 만큼 돈이 없다. 버는 족족 사채업자 광일에게 바치고 폭력과 협박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틴다. 나이 들면 벗어날 수 있으려나, 도망가고 다시 도망쳐도 끈질기게 찾아내는 광일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현실이 지긋지긋하고, 사는 게 지겹다. 지금의 지옥을 벗어나는 일은 죽어버리던가 어서 빨리 빚을 갚아버리는 일이다. 돈을 위해선 못해본 일이 없고, 못 할 일도 없다. 여러 개의 알바를 동시에 해도 빚은 줄어들지 않는다. 유일한 피붙이로 거동이 불편한 청각장애 할머니가 있다.
우직하니 정이 많은 동훈은 부모, 형제, 친구 등 주변에 사람이 많다. 무슨 일이 생기면 대신 화내 주고, 아파하고 속상해할 사람들이다. 그렇게 제 일처럼 팔 걷고 나설 사람들이라 속을 터놓지 못한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은 모든 문제를 혼자 끌어안고 고민한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외롭고 고독하다. 군중 속에서 느끼는 고독이 더 힘든 법이다. 삼 형제인 그에게는 밥벌이 못하는 형, 동생 그리고 어머니가 있다. 누가 시킨 적 없지만 자신의 어깨 위에 차례차례 의무와 책임을 짊어진다. 어머니 집을 마련하고 생활비를 대주고, 형 집안의 대소사에 돈봉투를 찔러준다. 동생의 용돈도 티 나지 않게 조달한다. 잘 나가는 변호사 아내와 유학 간 12살 아들, 부족할 것 없는 대기업 부장 박동훈. 그러나 성실한 무기수처럼 희망 없는 하루를 그저 견딘다.
“어떻게 하면 월 오륙백을 벌어도 저렇게 지겨워 보일 수 있을까. 대학 후배 아래서. 그 후배가 자기 자르려고 한다는 것도 뻔히 알면서 모른 척. 성실한 무기징역 수처럼 꾸역꾸역”
지안이 동훈에게 하는 말이다. 돈 때문에 접근했지만, 지겹고 쓸쓸해 보이는 이 아저씨가 자꾸 궁금하다.
(동훈) "망했어. 이번 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겸덕) "생각보다 일찍 무너졌다. 난 너 한 60은 되어야 무너질 줄 알았는데… 내가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는데 결정타가 너였다. 이 세상에서 잘살아봤자 박동훈 저 놈이다. 드럽게 성실하게 사는데, 저놈이 이 세상에서 모범 답안일 텐데… 막판에 인생 드럽게 억울하겠다."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간 친구 겸덕은 동훈이 안타깝다. 무턱대고 성실한 게, 타인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미루는 게 안쓰럽다. 유일하게 속을 보일 수 있는 친구는 승려의 길을 걷고 있다. 겸덕과의 대화는 여운이 깊다.
이 포스터처럼 웃을 일이 많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칙칙하고 우울하지만 평범한 우리 모습이다. 성실하게 꾸역꾸역 살아가는 내 이야기, 내 주변의 이야기다.
인생이 어찌 즐거울 수만 있을까. 똑같은 일상에 불쑥불쑥 찾아드는 무료, 권태, 지겨움은 기운을 쏙 빠지게 한다. 술 한잔 기울이며 잠깐 잊어버릴 수 있지만, 순간의 즐거움은 다시 해가 뜨면 제자리다. 남들은 다 잘 나가는 듯 보이는데, 나는 왜 이럴까. 나만 왜 이럴까. 하는 일도 잘 안 풀리고 나 혼자만 패배자 같다. 사는 게 재미없고 무기력해진다.
뭣 때문에 사나?
무슨 영화를 누리려고 이 고생인가?
의미 없는 물음만 허공에 떠돈다.
나이 들수록 웃음이 줄고, 웃을 일도 잘 없다. 절망이나 불행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다. 다만, 장밋빛 미래가 안 그려진다.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드라마다. 드라마는 그나마 저들보다는 내가 좀 더 나은 것 같아 상대적 안도감을 주었다.
"잘못했습니다, 열 번 말해"
뒤에서 험담을 한 후배와 껄끄러운 관계에 직면했는데, 동훈의 해결책이 인상적이었다. 믿었던 후배, 너마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섭섭함을 넘어 분노와 미움이 생길 텐데, 현명했다. 후배는 진심으로 사죄하면서 면죄부를 받았고, 동훈도 용서를 구하는 열 번의 외침을 들으며 감정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인생 드라마로 손꼽기에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기대 이상이었다. 기록하고 싶은 명언도 많았다.
아픈 사람 눈에 아픈 사람이 들어오는 법이다. 지안과 동훈은 비슷한 점이 많다. 고독하고 애처롭다. 말수가 적지만 토해내는 말 한마디에는 농축된 마음이 담겨있다. 진심이 한껏 들어있어 감동과 울림이 있다.
지안에게 동훈은 키다리 아저씨다. 동훈을 통해 처음으로 위로받았고, 사람대접을 받았다. 동훈도 자신을 알아본 지안이 슬프지만, 지안을 통해 감정을 토해내고 흠뻑 울 수 있었다. 꽉 막혀있던 체증이 뚫린 것 같다. 여전히 어깨에 짐을 내려놓진 못했지만, 한결 가벼워졌다.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숨이 쉬어져"
사람 때문에 아프고 상처받는다. 사람 때문에 슬프고 외롭다.
사람 때문에 기쁘고 위로받는다. 사람이 곁에 있어 행복하다.
사람이 병도 주고 약도 준다.
사람이 준 상처, 사람으로 치유한다.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