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일지>
처음 만나는 작가다. 몸을 이용해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가라고 한다. 빈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대신, 몸을 움직이는 행위가 작품이 되는 활동을 한다고 한다. 어떤 작품이 있을까 검색해 본다. 그중 ‘내가 그린 가장 큰 원’ 이 기억에 남는다. 땅바닥에 엎드려 누운 자세로 다른 도구 없이 자신의 몸을 이용해 그릴 수 있는 최고로 큰 원을 그려냈다. 바닥에 그려진 하얗고 커다란 동그라미가 참신하고 기발했다.
이미지 출처 : https://blog.naver.com/sas_g/222592007855
이번엔 한 겨울 꽝꽝 언 호수 한복판에 섬을 만들기로 한다. 미국의 한 작은 마을, 호수 한가운데에 삽과 썰매를 이용해 눈을 퍼 모아서 쌓는 작업이다. 작은 입자의 눈송이들이 쌓여 제법 커다란 언덕이 되어간다. 사진으로 본 섬은 그 크기가 막 와닿지는 않았지만 섬이 아님을 부정하긴 힘들었다.
“호수에 나가있을 때는 조금 무섭다. 얼음이 두꺼워서 깨지진 않을 거라고 이곳 레지던시 디렉터인 댄이 말했었고, 스노우 모바일이 잘 다니는 걸 보면 안전한 것 같지만 눈을 쌓다 보면 얼음에 하중이 많이 실릴 텐데, 괜찮을까? 내가 삽질로 쌓아봐야 얼마나 쌓겠나 싶으면서도 이 작업에서는 안전할 것을 가장 신경 써야 되겠다. 호수가 나를 허락해 주었으면 좋겠다.” (p5)
추울 때는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날씨로 호수는 육지처럼 튼튼해 보이지만 이따금씩 들리는 ‘둥~둥’ ‘쩍-‘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줄행랑을 치기도 한다.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한 달간 진행된 과정은 고된 삽질이었다. 눈을 한 삽 한 삽 퍼 나르며 기록한 작품 일지다.
“호수 위에 삽과 썰매로 눈을 쌓아 올려 봄이 되면 녹아 없어지는 섬을 만들었습니다. 얼어있는 호수 위에 만든 섬으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두려움, 연약한 존재의 인간에 대한 작품”이라고 작가는 설명합니다.
“섬은 점점 커지고 더 무거워진다. 그리고 그 섬은 불안한 얼음 지대 위에 서있다. 정말로 내가 이 일을 하다가 차가운 물속에 빠져 죽는다면, 나는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바벨탑을 짓고 있는 것이 되는데,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쌓은 섬이 내 욕망의 바벨탑이라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흉물스러워서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p32~33)
분명 자신이 선택한 일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된 노동과 불안감에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지’ 후회도 한다. ‘오늘은 삽질하기 좋은 날이군’ 날씨가 도와주는 날엔 발걸음이 즐겁기도 했다. 추위에 호수는 꽁꽁 얼었지만 기온이 오르고 섬이 점점 커질수록 그 무게로 호수가 어떻게 될까 봐 불안했던 마음이 글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왜 호수였을까? 따뜻한 봄이 되면 녹아 흔적도 없어질 무용한 일을 왜 기획한 걸까? 여러 감정을 겪으면서 끝내 긴 작업을 완수한다.
어떤 이는 매일 쳇바퀴 도는 일상과 비교해 작가의 일지를 인상 깊게 읽었다고 했다. 피곤하고 고된 몸을 이끌고 삽질하러 장비를 챙기는 일이 꾸역꾸역 일하러 억지로 일어나는 직장인과 겹치기도 한다. 작가의 삽질은 봄이 오면 마칠 수 있지만, 먹고사는 일에 마감이 없는 월급쟁이에겐 기한 없는 출근길이다.
삶을 이어가는 일이란 자신만의 섬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섬을 어디에 쌓아야 하는지가 중요하겠다. 나만의 섬을 완성하는 일은 누군가의 꿈이고 이루고 싶은 목적지일 텐데, 봄이면 사라지는 ‘눈’이라는 소재나, 점점 키가 커질수록 존재가 위태로워지는 호수 한복판이 아니어야 한다. 내가 가려는 목적지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속성을 가졌는지, 성공에 가까워질수록 존재가 위태로워지는 위치는 아닌지, 가늠해 보면 좋겠다.
자신이 쌓아온 섬의 높이는 저마다 다르다. 제법 큰 산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여전히 납작한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품과 우리 일상의 공통점은 자신의 선택으로 섬을 쌓기로 했다는 거다. 작가는 작품을 위해,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지루하고 고된 삽질을 견딘다. 무해하지만 무용해 보이는 삽질이다. 사람이 태어나 한평생을 살면서 그 삶의 이유가 잘 먹고 행복하는 거라면 우리는 일 대신 재미있는 놀이를 찾아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하고 재미있는 것들에는 돈이 많이 든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다시 삽을 들어야 하고.
직접 경험하고 부딪친 것들에서 깨달음을 얻고 지혜가 생긴다. 지루한 반복 속에서 남는 게 있다.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경험이었다면 그 마저도 깨달음이 된다. ‘다음엔 하지 말아야지!’ 하는 깨달음. ‘시간 낭비 했구나!’ 하는 뼈저린 자각. 하지만 작가는 몸으로 부딪쳐가며 한 달의 고생을 통해 ‘죽음’과 ‘자연에 대한 경의’ ‘유한한 인간’등의 키워드를 건져냈다.
세상에 바보 같은, 쓸모없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