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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제이 Apr 08. 2017

42 보리차 사건

세 살의 어느 일요일 오후.


두어 시간 낮잠을 자다 깬 아들은 잠이 부족했는지 계속 칭얼거린다. 

아빠도 할머니도 다 필요 없고 엄마만 찾는다.  

한참 저녁 준비에 바쁜 엄마는 아들을 봐줄 수가 없다. OTL
계속 칭얼대는 아들을 지켜보다가 삼촌이 두 팔 걷고 나선다. 


"주연아, 우리 토마토 보러 갈까?" (베란다에서 키우는 토마토, 3개 열렸다) 
 "-" (불안한 눈치) 
"엄마. 엄마 가자! 토마토 보여 가자
엄마 지금 밥 해야 돼, 엄마가 맛~있는 저녁 해줄게, 응? 삼촌이랑 토마토 보고와
 "아앙... 아앙...
 (조카가 따라오길 기다리며, 베란다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삼촌이 토마토 따먹어야지. 삼촌이 딴다! 주연이 오면 안 딸 건데~

주춤주춤 망설이다 베란다로 뛰어간다. 

토마토는 지켜야 한다. 

토마토가 열리길 얼마나 기다렸는데, 삼촌에게 수확의 기쁨을 뺏길 순 없다. ㅋㅋ


저녁은 된장국에 새콤달콤 돌나물을 무쳐서 먹었다. 

설거지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보리차 끓일 준비를 한다. 

보리차와 옥수수가 담겨 있는 원형의 플라스틱 통을 한 손으로 집었는데 손에 물기가 있었나 보다. 

손에서 미끄러지면서 ‘촤르르~’ 내용물이 쏟아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부엌 바닥에 골고루 뿌려진 보리차+옥수수.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까르르! 까르르!" "와하하! 하하!" “깔깔 깔깔

주연이 배를 잡고 웃는다. 어른처럼 고개까지 뒤로 젖혀 가며 웃는다.  

엄마가 실수한 게 그렇게 웃긴 모양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아 멍하니, 맥없이 있었다. 

그러다 아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치울 생각도 안 하고 한참을 같이 웃었다. 


마침 부엌엔 우리 둘 뿐이었지만, 누군가가 봤다면 틀림없이 주연을 의심했으리라. 

한참을 웃다가 아들과 같이 손으로 한 알씩 주워 담는다. 

'나에겐 귀찮은 일이지만, 주연인 이런 것도 놀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랑 하는 모든 것들이 마냥 즐겁고 신이 나는 모양이다. 

대충 큰 무리들은 주워 담고, 작은 것들은 버리려 하는데,


"엄마, 이거는 이제 어뜨케 해?


저런 말을 알려 줬던가? 가르친 기억이 없는데 새로운 단어를 쓴다. 기특하고 귀엽다. 


아들을 재우려고 이불을 덮어 주며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 

갈수록 굵어지는 팔, 다리, 발목을 차례로 확인하며 스트레칭해주는 일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어른이 되면, 실수하는 게 창피하고 두려운 일이다. 

실수를 안 하기 위해 긴장하고 머리 아플 정도로 몰입한다. 

큰 잘못이 아닌 사소한 실수는 아이처럼 웃음으로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런 너그러움을 잊고 산다. 

바쁘고 복잡한 사회에 살면서 그런 작은 여유조차도 시간낭비라 생각이 드는 걸까? 

웃음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싫은 소리 안 듣고 야단 안 맞는 것에 안도하는 경우가 더 많다. 

실수의 상황을 조용히 넘어가 주는 게 어른에게는 아이의 웃음과 같을 때가 있다. 


청량감 있는 아이의 웃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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