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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a May 17. 2021

문어숙회의 마음

이미지는 Real Foods라는 잡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웬만한 해산물은 전부 좋아하는 필자이지만, 문어숙회만큼은 도통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유는 너무 맛있기가 힘든 음식이기 때문이었다.

가령, 열 번의 감자탕을 먹는다고 하면, 8번이나 9번은 만족하게 되지만,

열 번의 문어숙회를 먹는다고 하면, 많아야 두 번 정도 만족하게 된다.


아마 익힘의 정도가 완벽해야 하기 때문일 텐데,

너무 설익어도, 반대로 너무 익어도 질긴 음식이 되어버리고 만다.


최근에 미국으로 다시 삶의 터전을 옮기고 느낀 점이,

서양 요리가 동양 요리에 비해 덜 당긴다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

문어라는 재료만 한정해서 생각하면 서양이 요리를 훨씬 잘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문어 구이든 문어 세비셰든, 한국에서 먹던 문어보다 만족감이 훨씬 컸다.


같은 문어여도 이 곳의 문어와 한국의 문어가 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역시 숙회라는 조리 방식이 문제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며칠 전에 우연히 티비에서 개그맨 김원효 씨가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오륙도를 다녀오는 영상을 봤다. 영상 촬영 기준 돌아가신 지 1 년이 된 터라 아직 가족들 모두 슬픔에 잠겨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해당 영상을 보면서 필자도 아버지를 떠나보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

그때 드는 감정의 야속함이 마치 문어숙회와 같았다.


아버지를 잃고 나서 3년 정도까지는 너무 슬펐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외면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서부터는 또, 아버지와의 이별을 떠올려도 눈물이 잘 나지 않고, 가졌던 기억들이 점차 희미해지는 것을 경험하며, 그것이 또 야속했다.


초반에는 무던함이 조리가 덜 되어서 질기고, 부지불식간에 무던함이 조리가 너무 되어서 또 질겨지는, 그런 감정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마음에 적당함이란 상태도 분명 있긴 있을 것이다.

적당한 슬픔과 적당한 무던함이 공존하는 그런...


그러나 이제 그 시간이 또 지나가 버렸고, 아버지와의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그런 적당한 무던함의 시간 역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세월이 야속할 뿐이다.


덜 익은 문어는 조금 더 삶으면 되지만, 너무 익은 문어는 해결방법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앞으로 남은 긴 세월 동안엔, 익어버린 문어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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