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화. 그 두려움을 마주한 날

세 가지 시간에 피어난 무지개를 담다

by 기록하는 엘리

2부. 현재 ― 살아내는 시간 (Day 11~20)

16~20일 : 내 안의 두려움과 성장

Day 17. 그 두려움을 마주한 날


상실의 숲에서 길을 잃은 너에게: 이제야 건네는 뒤늦은 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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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낡은 책상을 마주하며]


밤이 깊어지면 가끔 나는 20대의 네가 앉아 있던 그 낡은 연구실 책상 앞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고는 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컴퓨터 팬(Fan) 소리와 형광등의 미세한 떨림, 그리고 책상 가득 쌓인 논문 더미 사이에서 퀭한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던 나의 뒷모습. 그때의 나는 마치 세상을 다 짊어진 듯 무거운 어깨를 하고 있었지.


지금의 내가 그 방 문을 열고 들어가 너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는다면, 나는 아마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릴 거야. 그리고 묻겠지. "결국 이것이 네가 원하는 미래니? 내가 꿈꾸던 그 화려한 미래에 도착했을까?"라고.


미안하게도 나는 네가 기대했던 대답을 해줄 수가 없어. 나는 네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러나 네가 그토록 갈망했던 '진짜 평온'이 무엇인지 알려주러 왔거든. 30대 중반의 내가, 20대의 너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이제야 긴 편지로 적어 보낸다.



[네가 흘린 눈물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었어]


'포기'를 절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떻게해서든 극복하고 이겨내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과 현실의 벽에서 주저앉고 말았지. "노력하면 다 된다더니, 왜 나는 안 될까?"라는 자책은 내 영혼을 갉아먹는 독이었어.


하지만 지금의 내가 보기엔 그날의 너는 결코 패배자가 아니었어. 너는 단지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벗을 용기를 냈던 것뿐이야. 네가 그토록 매달렸던 학위와 직업과 직무의 성벽은 사실 네가 원했던 행복의 모양이 아니었어. 나는 그 가시밭길을 걸으며 네 한계가 어디인지, 네가 무엇을 할 때 진정으로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네가 무엇을 위해 스스로를 도살장으로 몰아넣고 있는지를 온몸으로 배웠던 거야.


그때 네가 흘린 눈물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 영혼이 보낸 마지막 구조 신호였을지도 몰라. 그 신호를 외면하지 않고 쳇바퀴에서 내려오기로 한 네 결정 덕분에, 지금의 내가 아이의 손을 잡고 사계절을 느낄 수 있게 된 거야. 그러니 더 이상 그날의 선택을 미련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렴. 그것은 내 생애 가장 위대한 '탈출'이었으니까.



[비눗방울은 터졌기에 아름다운 거란다]


연구개발자를 거쳐 기획자로, 육아휴직자로. 너는 네 커리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 같아 두려웠지? 동료들이 저만치 앞서 나갈 때 너만 멈춰 서 있는 것 같아 밤잠을 설쳤던 것도 알아. 하지만 내가 만난 인생의 진리는 조금 달랐어.


인생은 견고한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비눗방울을 부는 것과 같아. 너는 네 성취들이 비눗방울처럼 터져버릴까 봐 전전긍긍했지만, 사실 비눗방울은 터지는 순간까지 온 우주의 빛을 머금고 있기에 아름다운 거야. 네가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웠던 열정, 직무를 바꾸며 고군분투했던 그 치열함은 비록 '결과물'로 남지 않았을지언정 인생에 있어 도전이었고, 아름다운 무지개 같았어. 무지개를 잡으려고 달려간다고해서 무지개를 잡을 수는 없고 점점 더 멀리 도망갈 뿐이야. 물안개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무지개 빛깔이 참 곱고 아름답기에 마음에 담아두어야 하는 것이지. 하늘의 별을 딸 수 없듯이. 무지개 또한 환상속에서 더 밝고 선명해질거야.


그러니 네 커리어에 생긴 그 공백을 '단절'이라 부르지 마. 그것은 더 아름다운 비눗방울을 불기 위해 숨을 고르는 '여백'일 뿐이니까.



[세 명의 나(我)와 함께 걷는 이 길]


지금의 나는 너를 포함한 세 명의 나와 함께 걷고 있어.


먼저, 과거의 너를 늘 내 마음속에 품고 산단다. 성취에 목말라 자신을 괴롭혔던 너를 이제는 내가 안아줄게.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제는 나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지 말자.


두 번째로, 현재의 나는 아이라는 축복 속에서 '나’라는 계절을 지나고 있어. 아이의 눈을 통해 세상을 다시 배우고, 기록을 통해 흩어지는 찰나의 순간들을 영원으로 빚어내는 기쁨을 누리고 있지. 엄마로서의 삶은 네가 우려했던 '희생'이 아니라, 나를 다시 세우는 '발견'의 과정이야.


마지막으로 미래의 나는 네가 그토록 원했던 로드맵을 스스로 그려나가고 있어. 회사가 정해준 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어 가꾸는 울창한 숲. 어떤 환경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이 단단한 자신감은, 역설적으로 네가 겪었던 그 수많은 실패와 포기에서 온 거야.



[너의 북극성을 잃지 마]


우리가 길을 잃을 때마다 바라봐야 할 세 가지 가치를 잊지 마.


첫째는 주도성이야. 남들의 시선이나 사회적 이름표에 네 인생을 맡기지 마. 포기조차 네가 결정했다면 그것은 주도적인 삶의 시작이야.


둘째는 기록이야. 네가 겪는 이 고통과 환희를 모두 글로 남기렴. 기록은 비눗방울처럼 사라질 인생을 영원한 유산으로 바꿔주는 마법이니까.


셋째는 성장이야. 완벽해지려 애쓰지 말고, 어제보다 조금 더 흔들리더라도 조금 더 나아가는 미완성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렴.


2005년 가을에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시를 보며 가슴 설레던 중학교 1학년 시절의 마음을 기억하니? 너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네가 걸어갈 길이 비록 가시밭길일지라도, 사람이 적게 간 그 길을 선택함으로써 네 인생의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웃으며 안녕을 건넨다]


편지를 마무리하며, 나는 다시 한번 과거의 나를 그려본다. 연구실 구석에서 치열하게 밤을 새던 나의 모습을. 이제는 내가 너를 그 방에서 데리고 나와서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와서, 계절을 즐기며 노랗게 물든 숲길을 함께 걷고 싶다.


"그때 버텨줘서 고마워. 그리고 그때 용기 있게 포기해줘서 고마워."


아픈 계절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사계절의 평온을 누릴 수 있었고, 나는 결코 실패한 적이 없어. 단지 지금의 나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치열한 겨울을 견뎌온 뿌리였을 뿐이야.


미래의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훨씬 더 행복하기에 안심하렴. 나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고, 나의 기록은 멈추지 않을 거야. 시공간을 넘어 너에게 내 온 마음을 담아서 나에게 알려주고 싶어.


사랑한다, 나의 소중한 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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