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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햇 Jun 25. 2019

길들이고 길들여진다는 것은

관계, 수용과 변화의 하모니

난 너에게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 생택쥐페리, 어린왕자 중 -




세상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는 우리 곁을 쉴 새 없이 스쳐가는 대상들,

그 속에서 특별하고 오직 하나밖에 없는 사람,

- 아마도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관계가 생겨나는 순간부터 사람은 그저 그런 ’ 대상’에서 특별한 ‘존재’로 거듭난다

어린 왕자가 말하는 ‘길들여짐’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누군가에게 특별해진다는 것은 행복한 일




하지만 관계 속에서 길들여지는 과정 마냥 행복하고 쉽지만은 않다

한 평생 살아오던 방식을 고수하지 못한 채 변화를 시도해야 할 수도 있고,

매우 생소한 상대방의 성향을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도 많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며,

그 갈등을 풀어가는 방법까지도 서로에게 길들여져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심리상담 센터에서 3년 동안 대인관계 집단상담에 몸 담아 보면서 깨달은 것은 이 상호 길들임의 과정이 바로 ‘관계’라는 것이다




관계라는 것은 어쩌면 평생의 조율 과정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길들이는 과정이 얼마나 기꺼운가에 따라 관계의 존립과 수명이 결정된다

이해하고 절충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한 순간부터 관계의 앞날은 불투명해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관계는 수용이다

서로의 특성에 대해 받아들이고 적응해보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관계는 많은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하며 때로는 고통이 수반되기도 한다









모든 관계는 상호 길들임의 과정이 필수적이겠지만,

그중에서 서로에 대한 길들임이 가장 많이 필요한 관계는

단연 연인이나 배우자 관계일 것이다

서로에게 가장 특별한 존재이고 싶은, 또 그러기를 자처한 관계일 테니까




나의 삶 속에서도 길들임은 사소한 부분부터 굵직한 부분까지 다채롭게 벌어지고 있다




감정의 폭이 큰 나는 기분이 좋을 땐 한 없이 들뜨는 스타일인 반면 남자 친구는 늘 ‘평범해’라는 상태로 일직선을 그리며 살아가곤 한다

지난 일요일, 남자 친구와 점심을 먹고 나와 커피숍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배도 부르고 날씨도 좋아 신이 난 나는 길거리를 폴짝거리며 다니다가 길 어딘가에 신발이 세게 걸려 여의도 한복판에서 신발이 터지고 말았다

신발은 신고 다닐 수도 없을 정도로 망가져서, 간신히 끌고 다니는 느낌으로 발에 걸친 채 함께 근처 몰에 들어가 새 신을 사야 했다-



남자 친구는 초등학교 이래로 신발이 망가지는 것은 처음 본다며 적지 않아 당황스러워했다

사실 나는 최근까지도 기분이 좋아 까불 때면 신이고 가방이고 망가지는 것이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고,

덕분에 무릎, 팔, 손 등등 오만 데 이유 모를 상처와 멍을 달고 사는 편이라 그렇게 놀라울 것은 없었다 - 조금 민망할 뿐

동시에 기쁨도 슬픔도 크게 느끼고 표현하는 나를 신기해도 했다

그렇게 그는 나의 감정가와 그로 인해 종종 벌어지는 일들을 함께 겪으며,

나의 롤러코스터 같은 세상에 서서히 길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새 신발.  얌전히 신어볼게요......




성향이나 성격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부분에서도 길들임은 생겨난다



나 같은 경우 테크놀로지나 트렌드의 아웃사이더를 자초하는 스타일이었다

스마트폰은 카카오톡만을 위한 도구이며, 속도나 사양에는 관심도 없다

스타벅스에서 사이렌 오더나 프리퀀시는 이용해본 적도 없거니와 어플도 한 번 깔아본 적이 없다

휴대폰에 공인인증서 같은 것은 넣지도 않아 봤고, 스마트 페이는 어림도 없다- 카드와 현금을 쓴다

새로 나오는 최신영화는 뭐가 있는지, 뭐가 잘 나가는지도 모른다



남자 친구는 새로운 기술을 포함해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에 찰떡같이 따라붙는 스타일이다

그는 부지런히 정보를 모아 신기한 가격에 최신 폰을 사곤 한다

남자 친구와 같이 스마트폰을 바꿨고, 하나하나 직접 설정해주고 설명해주는 것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나는 5G 인터넷과 삼성 페이를 쓰고 있었고, 스타벅스에서 사이렌 오더로 커피를 주문하게 되었다

최신 화제작을 누구보다 먼저 보고 있으며, 요즘 핫한 에그드랍 샌드위치나 더앨리 흑당 버블티를 먹어본 사람이 되어있었다



나는 그의 세상을 따라가는 속도에 길들여지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멀리했던 빠른 속도로 바뀌는 세상은 생각보다 편리했고, 막연한 거부감에 비해 꽤 괜찮았다

그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나에겐 성장이고, 즐거운 변화다





너는 나 나는 너


가치에 대한 길들임은 사실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부분이다



남자 친구는 효율성과 현실적인 가치가 중요한 분야에 종사하지만

나는 인간성과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분야에 종사한다


때문에,

남자 친구는 전체적인 사회의 변화와 성장에 관심을 가진다면

나는 그 변화와 성장 속에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이토록 상반되는 삶의 배경 속에 서로의 분야와 시각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

주말이면 카페에 앉아 각자의 분야에 대한 책을 맞바꾸어 읽어본다

남자 친구는 인간의 내면과 관계에 관한 책을,

나는 세상 돌아가는 원리와 이치에 대한 책을 읽는다



서로의 분야의 책을 쉽게 읽어나가질 못하고 고군분투한다

한 달째 같은 책을 붙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공통된 생각으로는, ‘한 번 읽어서는 안 되겠다’였다

익숙지 않은 시각과 관점, 그것을 이해하고 길들여지기 위한 노력은 역시 쉽지 않다



그에게 익숙한 분야의 책을 읽고 내가 던지는 질문을 남자 친구는 재밌어하고,

관점의 차이로 말미암아 많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가 내 분야의 책을 읽고 숙고하고 고뇌하는 모습도 예쁘다

평소 같으면 거들더도 안 봤을 책을 내가 한 달 넘게 씨름하며 붙들고 있는 이유다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과정은 다채롭다

상대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응해나가는 부분도 있는가 하면,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노력해볼 부분도 있다



부단히 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에게 길들여져 본다면

어려움과 힘듦을 감내하고도 멈추고 싶지 않은 그런 관계를 갖게 될 것이다



적어도 나는,

수많은 여우들 속에서

당신에게 ‘특별한’ 사막여우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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