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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햇 Feb 26. 2020

삶이란 밭의 휴작기

오로지 나뿐인 시간 속 오롯한 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최근 혼자만의 시간 속을 유영하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꽤 최근까지 관계들과 일 사이를 정처 없이 헤매던 나였다. 그러다 내 손으로 일을 완전히 정리해 휴지기를 맞이하였고, 연애도 롱디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면서 오롯이 나와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사실 치밀한 계획 속에 기획한 휴식은 아니었고 갑작스러운 면도 컸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많은 시간들을 어찌할 줄 몰라 방황했다. 간헐적으로 퐁퐁 솟아오르는 생각들과 불안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안고 가야 할 줄 몰라 괴로웠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 즐거워했는지 이토록 기억이 안 날 수 있나 싶었다.



     초반에는 불안함에 주로 미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답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미래라는 상황이 괴로웠다. 이내 미래를 점치길 그만두고, 지금의 시간을 잘 보내는 방법으로 주의를 돌렸다. 방황의 상태로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의 즐거움이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고유의 나로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오랜만에 방구석에 미뤄뒀던 가야금을 꺼내봤다.  뚱땅뚱땅 어색하고 서툴지만 오랜만에 뜯어보는 느낌이 좋았다. 못해도 좋았다. 그저 즐거웠으니까. 그거면 됐다.




    오랜만에 서점에도 갔다. 코로나 때문에 전세 낸 듯 한적했다. 원래 서점을 참 좋아해서 독립서점이며 북카페, 대형 서점이며 할 것 없이 엄청나게 다녔었는데 참 오래도 발길을 끊었음을 실감하며, 물 만난 물고기처럼 보고 싶은 책들을 잔뜩 사서 돌아왔다. 거의 십만 원 좀 넘게 산 것 같다- 집에 와서야 내가 보릿고개에 있는 백수임을 깨닫고 잔고를 보고 악! 소리를 질르며 울어야 했지만 말이다 젠장-. IT 부적응자 주제에 아이패드 프로를 소장하고 있지만, E북은 종이책의 촉감과 감성을 대체할 수 없어 책은 굳이 종이책으로 본다. 서점과 종이책은 사랑이다.




    한 동안 멈췄던 글도 다시 쓰고 싶어 졌다. 한 때 브런치는 즐겁게 느껴졌는데 이상하게 최근 한 동안 글이 써지지 않았다. 생각이 쉽사리 정리되지 않았고 세파 속에서 나라는 사람의 중심을 잡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꺼내 보이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었던 것도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가다듬으며 사유하기 시작했고, 글을 남기기 시작한다. 괜찮아-.



     집에서 놀고먹으니 자연스레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것, 바로 요리다. 생각보다 즐겁다. 여러 바쁜 일들에 치여 해야만 하는 게 아니니까, 여유로이 도전해보고 싶었던 메뉴를 해보기도 하고 먹고 싶은 걸 만들어내기도 하면서 얻는 즐거움이 크다. 원래 먹는 것에 그렇게 의미를 두지 않고 특히 바쁘거나 일이 많을 땐 먹는 행위를 연료를 주입하는 일 정도로만 생각해서 대충대충 먹곤 했다. 지금은 다르다. 밥 해 먹는 게 하루의 가장 크고도 유일한 과업이라 정성 들여 요리하고 천천히 음미한다. 밥을 해 먹는 행위가 새삼 숭고하고 가치롭게 느껴진다.








    다시금 고유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 어쩌면 이게 퇴보는 아닐까 걱정도 했다. 최근 몇 년간 내적인 변화를 위해 많이 애쓰며 쉼 없이 달려왔고 실제로도 많이 바뀌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간을 도루묵으로 하고 이전의 나로 돌아가버린 건 아닐까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진보니 퇴보니 논하는 게 다 무슨 의민가 싶었다. 나의 상태를 평가 내리길 그만두기로 했다. 지겹고 지쳤다- 늘 내가 나를 잘하고 있나 24시간 감시하는 일 말이다-. 상당 부분 나의 불안의 근원은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평가 때문이다.



      요즘은 직장에도 안식월이나 안식년을 주는 곳들이 종종 있다고 하던데, 지금 시간들은 스스로에게 주는 안식월 같은 느낌이다- 속된 말로 그냥 다 때려치우고 논 것이지만 좋게 포장해서 안식월이었다고 하겠다-. 지금 놀고먹는 시간이 너무 좋고 행복한 자명한 사실이지만 평생 돈을 줄 테니 이렇게 살싶으냐고 물어본다면 사실 그건 아니다. 탈하고 꿈 없고 현재에 만족하는 척 하지만 사실 난 욕심도 많고 성취를 좋아하며, 전형적인 현대인으로 심히 살다가 한 번 달콤하게 쉬는 다. 생겨먹은 대로 살아야지 뭐 어쩌겠는가.



     그럼에도 한 번씩 이런 나를 오롯이 바라보고 느껴보는 휴식의 시간은 퍽 괜찮은 것 같다. 혼자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나, 그 곁을 맴도는 수 백 가지 감정들, 실로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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