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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햇 Nov 19. 2020

직장인의 운수 좋은 날

아주 평범한 출근길


  예상 강수량이라고 발표된 100ml는 애저녁에 넘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비가 오는 아침이었다. 집에서 지하철역에 가는 길, 바지는 이미 무릎을 기점으로 진한 워싱의 투톤 바지가 된 지 오래였다. 횡단보도 가장자리에 빗물이 다 빠지지 못해 수영장처럼 고여 있고, 웅덩이를 짚고서야 지나갈 수 있는 우리네 소시민들은 하릴없이 발을 담그고 가던 길을 가고야 만다. 아, 들어온다 물. 인조 가죽은 빗물이 안 샐 줄 알았는데 한 번 고개를 디민 물은 진하게 스며들어 발감싼다. 걸을 때마다 신발 바닥 쿠션에서 찌끅찌끅 요상한 소리가 난다. 단전에서부터 뭐가 올라온다. 마스크를 낀 이상, 입모양은 자유다.


아잇 차가와-


  지하철역에 다다른 여느 사람들의 정강이는 한결같이 진-했다. 뭐랄까 다들 전우 같다 출근하는 전우들. 물 머금은 바지와 워터파크 개장한 워커를 이끌고 발길을 재촉한다. 이건 젖은 바지의 무게일까 내 삶의 무게일까. 한 몸만 책임지면 되는 가벼운 존재지만 애 둘 있는 가장 흉내를 내본다. 내 한 몸뚱이 챙기기도 이리 힘든데 애는 무슨. 어젯밤 들려온 또래의 임신 소식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어 본다.



   환승을 기다리는데 어- 평소의 바이브가 아니다. 줄이 왜 이리 길지...... 불길한 마음에 들여다본 휴대폰 실검 1위 "2호선" 당첨....... 지연 운행...... 계절도 모르고 내리쬐는 에어컨 바람에 잔뜩 젖은 바지가 감싼 양다리가 시려오기 시작하고, 축축한 워커 속 발은 불어 터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전역, 전 전역까지 배차는 당최 보이질 않고,  구구절절 팀장님께 사정 설명을 드린다. 잘못은 지하철이 했는데 왜 내가 죄인같은지...... 무념무상 열차를 기다린다. 올 기미도 없다. 입사 후 첫 지각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 연착이야 대 연착



    회사에 이미 있어야 마땅할 시각, 승열차만을 기다리는데 겨우 도착한 지하철 한 대는 어마어마한 밀도를 자랑했다. 순대 껍데기에 내장 넣듯 꽈아아아악 속을 채운 열차에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인파에 의해 쏠려 들어갔다. 꽉 끼었다. 우산을 건 오른팔이 어딘가 너무 압박적이라 불편한데 차마 움직일 수가 없다. 흉곽이 너무 눌려서 숨쉬기가 힘들다. 비 내린 습기에, 사람 숨에, 열차 유리에는 물기가 방울방울 매달려 있었다.



   끼이고 끼인 상태에서 팔을 올려 사이렌 오더로 샷 추가한 라떼 한 잔을 주문한다. 어차피 늦은 거 자포자기한 심정이다. 커피라도 없으면 그 무엇도 이 아침을 위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대환장-만원 지하철 속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회사가 있는 역에서 용수철 튕기듯 내려 마침내 지하철을 빠져나와 지상으로 올라갔다. 바지를 무릎까지 다 적신 비가 아직도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우산을 켰는데 웬걸 반절만 펴지고 나머지 반은 앙상한 뼈대만 펴졌다. 아까 지하철에서 우산을 건 팔이 너무 아프다 싶더니, 마구잡이로 휩쓸리다 뼈대와 천이 다 분리가 돼 거의 넝마 조각 같은 모양새였다. 이 출근길을 겪고 나니 도오저히 그걸 수습할 힘이 남지 않아 그냥 그대로 회사까지 걸았다.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넝마 우산 따위 백 번도 더 쓰라지. 한 손에 꼭 쥔 열차지연증명서, 그것만 있으면 나는 되었다.



   이 모든 게 한 시간 안에 일어난, 아주 평범한 직장인의 사소한 아침 출근길이었다. 아직 출근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오전 09시 07분였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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