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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햇 Nov 24. 2021

냉장고는 그냥 채워지는 줄 알았다.

새댁의 서투른 독립 일기


  아침에 바삐 출근 준비를 하고 아침을 먹으려는데, 젠장 또 두유가 없다. 두유에 말아먹는 달달한 초코 시리얼은 신성한 출근 의식이거늘……. 전투식량이 배급되지 않자 맥이 빠진다. 아니 분명 매주 의욕적으로 온라인 장보기 7~8만 원에 달하는 장을 보는데 왜 또 아침거리가 없는 걸까? 부모님 집에 살 때는 곳간 비는 일이 좀처럼 없었는데 내 집 곳간은 왜 맨날 텅텅 비어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이다. 독립하기 전까지 냉장고는 그냥 채워지는 줄 알았다. 아침 못 먹은 서러움을 가득 안고 회사 화장실에서 머리를 굴리며 내일 아침에 먹을 것들을 한바탕 주문한다.


전투식량은 중요하다


  결혼 53일 차 새댁이다. 비록 오십 여 일 밖에 지나진 않았지만 독립을 실감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TV로 남이 삼시세끼 챙겨 먹는 건 그렇게 힐링되고 재밌는데(예컨대 슬기로운 산촌생활- 최애 프로다) 내 삼시 세 끼는 왜 점점 재미를 잃어가고 생존을 위한 업무가 되어가는지, 장은 어떻게 봐야 똑 부러지고 알뜰한 건지, 몇 개 안 담은 것 같은데 가격은 왜 10만 원을 웃도는지, 요릴 할 때 완제품이 저렴한지 아니면 각 재료를 사서 만드는 게 저렴한지, 긴 긴 머리는 왜 병 걸린 사람처럼 맨날 한 움큼씩 빠져 온 집안에 넘실대는지, 빨래는 왜 맨날 하는 것 같은데 또 쌓여 있는지, 빵꾸난 양말은 언제 안 잊고 기워놓을지……. 구시렁구시렁 혼잣말만 늘어간다.



  집을 가꾸고 유지하는 건 정말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걸 실감한다. 달리 전문직이 아니라 주부가 전문직이다. 고로 나는 가사 전문직 체질은 아닌 것 같다. 그나마 토끼 같은 신랑이 깡총깡총 뛰어다니며 집안 질서를 챙겨준다.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 아빠는 저엉말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놀라우리만큼. 또 그걸 지금에서야 알았다는 것은 그만큼 잘해도 티가 안 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여유로울 때 한 번씩 싹 정리하고 지지고 볶고 해 먹는 게 즐거운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대체로 아침부터 눈 감는 순간까지 여유가 허락되는 날은 손에 꼽히니까.



   퇴근길에는, 당장 오늘 먹을 저녁거리를 냉동실에서 냉장실로 옮겨 해동하는 것을 잊었음을 깨달았다. 너무도 늦었다. 아휴 답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처진 어깨로 집에 들어서는 순간 냉동실에 얼려둔 남은 피자가 번뜩 생각났다. 이것은 구원이다. 레인지에 가볍게 돌려 피맥 시간을 펼쳐보았다. 짜릿하다. 역시 사람은 죽으란 법은 없군 생각했다.

또 이렇게 넘어가는거지



  어디 먹고사는 일뿐인가. 거저 받은 용돈으로 펑펑 쓸 땐 무서울 게 없었는데, 직접 번 돈으로 지출을 하려니 손이 그렇게 떨릴 수가 없다. 너무나 작고(또 작고) 소중한 이 급여를 어쩌면 좋을까? 조금만 덜 작아도 참 좋았을 텐데. 조금만 값이 나가도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저것을 지금 사면 어디서 또 아껴야 할까, 어디서 줄여야 할까 이 생각에 내려놓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왕년에 자취한답시고 가스비 전기세 새는 줄 모르고 한겨울 찜질방처럼 난방 쓰던 학생 시절의 모습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가스는 늘 '외출'로, 플리스와 전기담요로 버티는 거다. 존버는 거다.



  엊그제 관리비를 내고 오버된 이번 달 예산을 붙들고 부르짖는 내 모습이 생경하기도 하다. 살아가노라면 이렇게 다 악바리가 되고 독해지는 걸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고 이렇게 저렇게 노력하는 게 기특하기도 하다. 뭐든 대충은 또 못해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게 나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내 손으로 열어젖힌 삶의 두 번째 챕터를 또 이렇게 써 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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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사진은, 대충 먹는 방법을 못 배운 새댁의 신혼 밥상.

대충 먹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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