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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햇 Sep 06. 2022

대굴욕의 멀티버스, 미국 실외 테니스 코트


  매우 우울하다. 실외 코트에서 굴욕을 맛보고 왔기 때문이다. 나름 서대문구 M 모 실내테니스장 에이스 수강생이었는데, 테니스 좀 치는 줄 알고 실외에 나와 랠리에 도전해 보니 하나도 못 친다. 나름 레슨에서 선생님이랑 랠리 20개까지는 했었는데 말이다. 알고 보니 에이스는 내가 아니라 코치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초보도 실력자로 착각하게 할 만큼 공을 찰떡같이 쳐주셨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굴욕적이다.


  날씨는 엄청시리 좋았다. 예쁘고 찬란한 노동절 휴일이다. 한여름엔 너무 더워서 실외 테니스는 꿈도 못 꾸다가 9월이 되고 좀 서늘해져서 스멀스멀 도전해 보았다. 테니스장 가는 길만 해도 무지하게 설렜다. 한국서 주말부부하느라 남편이랑 테니스를 제대로 같이 쳐본 적이 없었다. 갈고닦은 실력을 뽐낼 생각에 혼자 엄청 즐거웠던 것 같다.



  코트는 시원시원하게 생겼다. 잘 치는 대학생 아이들이 먼저 치고 있었다. 당당하게 들어가서 한 코트를 차지하고 몸을 풀었다. 경치도 좋고, 날씨도 좋고 이런 데서 운동할 수 있는 게 참 좋은 환경이다 싶었다. 기분은 좋았으나, 내 실력은 그러지 못하였다. 야외 코트에서 남편이랑 둘이 쳐보니, 볼 머신이나 코치 선생님처럼 공이 예쁘게 오지도 않았고 실내 코트보다 크기가 두 배는 넓어서 뛰어다니니 금방 지쳤다. 나에게 넘어온 공은 블랙홀처럼 사라지거나, 홈런 친 영광의 야구공처럼 머나먼 곳으로 날아갔다는 후문이다.


  그동안 갈고닦았던 실력은 다 뭐였지? 다른 우주 자아의 실력이었나? 대혼돈의 멀티버스다. 상상 속 나는 옆 코트에서 공을 시원-스럽게 치며 뛰어다니는 미국 애들처럼 치고 있는데, 현실의 나는 레슨받으면서 배웠던 자세, 기술, 움직임을 하나도 못 써먹고 공만 쫓아다니기 바빴다. 너무 오래 쉬어서 감을 다 잃은 건지, 레슨과 게임의 차이인 건지 고민하다가 그냥 남편이 공을 이상하게 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쁜 X......



  못하니까 재미도 없다. 테니스에 대한 효능감을 다 잃고 시무룩하게 집에 왔다. 앞으로는 테니스장에 붙어살면서 연습할 수 있는 곳에서 혼자 폭풍 연습하기로 한다. 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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