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주고받는다고 하지만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하고 갈등하다 힘들면 그저 먹거리로 결정을 하면 무난했다. 다른 사람도 같은 생각인지 추석에 나 역시 주로 먹거리 선물을 받았다.
고기, 과일, 과자 간식을 먹으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을 실감했다. 음식을 먹으며 선물을 준 사람의 정도 되새기며 고마워했다. 선물로 받은 식품들이 상할까 염려되어 냉동실, 김치 냉장고를 왕래하기에 바빴다.
선물 중에서 상할 염려도 없고 갈수록 은근히 감칠맛이 배어 나오는 선물이 있었다.
받은 날부터 특별히 아주 가까이, 눈에 금방 띄는 곳에 두게 되었으니 바로 ‘감사노트’였다.
올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제자가 선물로 준 감사노트와 필기구이다.
내가 지금까지 해마다 결심해도 흐지부지 되고 말아서 이제 아주 시도하기를 포기한 것이 있다. ‘감사일기’였다. 이런 나를 어떻게 알았는지 제자가 추석 선물로 감사노트와 볼펜을 주었다. 김영란 법에도 걸리지 않아서 부담이 없으면서도 나를 업그레이드시켜 줄 기대에 기분이 좋았다.
고단하고 삭막하고 우울한 삶의 치료약이 ‘감사’라는 말을 들었다.
참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감사는 나의 예상과 달리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연습을 하고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횡재를 만나 저절로 감사를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작은 날개 짓을 하듯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감사하는 생활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저절로 수영을 하고 악기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배우고 연습하고 훈련을 해서 잘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했다.
새해가 될 때마다 감사 연습, 감사 훈련을 하고자 감사 일기를 쓸 작정을 하지만 늘 작심삼일이었다. 심지어 노트북 바탕화면에 파일로 만들어 놓고도 며칠 못 가서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할 것도 많으니 할 수 없다고 포기를 하곤 했다.
이심전심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이런 나에게 딱 맞는 선물이었다.
‘감사노트와 필기구!’
‘인생을 감사로 물들여라’는 문구가 첨부된 연둣빛 감사노트와 윤기가 나는 검은빛볼펜을 받고서 이번에는 꼭 감사일기 쓰기를 성공해 보리라 작정을 했다. 나의 특성을 생각해 볼 때도 이번에는 성공 가능성이 느껴졌다. 나의 특성 중에 무엇이든 선물을 받으면 선물을 준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양심상 꼭 알뜰하게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역지사지하는 마음이다.
감사노트와 펜을 준 제자의 정성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싶었다.
작심삼일로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거실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책꽂이에 들어가거나 서랍에 고이 간직하면 눈에 보이지 않아서 금방 잊어버릴까 봐 걱정되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긴장도 풀 겸 TV 시청하려고 소파에 앉으면 바로 앞에 감사노트가 대기하고 있다. 어서 쓰라고 권유하는 눈치다.
‘아, 그렇지. 감사노트가 있었지.’
TV 시청을 잠시 미루고 감사노트를 편다. 클래식 음악과 함께 마음도 고요해지고 정리가 된다. 그냥 넘어가면 감사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하루 같은데 감사노트를 열고 펜을 잡으면 감사할 일이 날개 짓을 하기 시작한다.
감사 노트를 쓰다 보니 감사는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매일 반복되는 삶이라고 홀대했던 일상들이 하나하나 다 감사였다.
감사의 선두 주자는 항상 아무 일 없는 일상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나와 연결된 사람들의 일상이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감사였다. 일상 속에 늘 하는 산책도 산책할 수 있는 건강과 여유가 감사였다. 무료로 즐기는 하늘도 구름도 코스모스도 마음의 먼지를 씻어주는 바람도 밤하늘의 둥근달도 모두가 다 감사의 재료들이었다.
감사 노트를 쓰다 보니 감사할 일과 감사할 사람을 우선으로 보려고 했다. 상처 받은 일도 있고 상처 준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것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감사할 일, 감사할 사람들을 앞세우게 되었다.
요리까지는 못해도 매일 아침 커피 한 잔 타 주는 남편도, 야근하느라 고생하면서 벌은 월급에서 명절이라고 가족들에게 맛있는 회를 사준 아들도, 명절 음식은 못했지만 설거지와 음식쓰레기 버리기를 책임져준 딸도 감사의 주인공들이었다. 명절 안부 인사 문자를 보낸 지인들도, 무거운 택배를 대문 앞에까지 갖다 준 택배 아저씨도, 깨끗한 아파트를 위해 작은 쓰레기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줍고 치워주는 경비 아저씨들까지도 감사노트의 한 줄 한 줄을 차지하게 되었다.
감사는 노트에만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차곡차곡 저장이 된다.
발효가 되어 다시 삶의 에너지로 날개 짓을 한다. 감사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감사할 것은 무궁무진하다. 무엇보다 감사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어 더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