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정으로 한 말도 사과할 줄 아는 천사 ~
돌이켜보니 어느덧 이십여 년이 흘렀다. 어느 아침 출근길이었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종로 3가에서 내렸다. 1호선으로 환승을 해야 했다. 평소와 달리 아무리 기다려도 지하철이 오지 않았다. 환승객들뿐만 아니라 종로 3가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모여드는 사람들로 승강장은 점점 북적거렸다. 예기치 못한 지하철 지연에 당황한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참 난감했다. 고장으로 지연되고 있음을 양해 바란다는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지상으로 나가서 버스를 타자니 기다린 시간도 아깝고, 지상의 교통 사정 또한 믿을 수 없었다. 이제 곧 오겠지 하는 기대감도 져버릴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처리할 일이 있어서 집에서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출발했다는 것이다. 지각은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불안한 마음을 다독거렸다.
지연된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도착하니 출근시간 10분을 넘긴 지각이었다. 핸드폰이 나오기 전이라, 도중에 공중전화를 찾아 연락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그냥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고의가 아니니 사유를 말씀드리면 이해하겠거니 내 마음만 믿었다.
교감선생님께 지하철이 지연되어서 늦었다고 하자 “알았습니다.”라고는 하는데, 사정을 알아주는 표정이 아니었다. 지극히 사무적이고 굳은 표정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참 머쓱했다. 내가 한 말이 벽에 부딪혀 튕겨져 나오는 것보다, 흔들리고 있는 신뢰가 더 당혹스러웠다. 평소에 지각 한 번 한 적이 없고, 나름대로 열심히 근무했다고 자부했는데……. 이미 뭔가 나름대로 짐작하고 판단하는 사람에겐 구구절절이 이야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에게로 가는 것이 더 급선무이기도 했다. 교실로 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온종일 수업을 하고 일과를 하면서도 신뢰받지 못한 아침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날. 그럴 리 없겠지만 전날의 지하철 고장이 떠올라 더 일찍 출근을 했다. 지하철이 제 때에 와주어서 평소보다 30분 정도 빨리 학교에 도착했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교무실에 들어서자 교감선생님이 나를 반겼다. 더 놀라운 것은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차가 고장 나서, 차가 막혀서"라는 사유는 지각하는 사람들에게 늘 듣는 말이어서 그냥 둘러대는 것으로 오해를 했다는 것이다.
지하철 1호선 고장으로 직장인들의 대량 지각사태를 빚었다는 저녁 뉴스를 보고서야 ‘아! 그랬구나.’라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혹시 나에게 상처를 주는 실수를 한 것이 아닌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는 것이었다. 잠시나마 오해한 것을 미안해하셨다.
말 한마디가 만들어 내는 위력. 세상을 달라 보이게 했다. 사소한 일이지만 진실이 인정받았을 때에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것 아닌가. 어깨를 펴고 당당히 하루를 시작하게 했다. 온종일 가슴속의 뜨거운 감동이 식지 않고 교실을 맴돌고 있었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움도 실수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용하게 해 주었다.
세상을 살아올수록 ‘아, 그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구나!’라고 나도 뒷북을 쳤다.
입으로 하는 말 이상으로 사람의 마음이 훤히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속으로 한 오해까지 사과하는 사람, 말로 한 것도 아니고 표정으로 한 말에 대해서도 사과할 줄 아는 사람. 참 드물었다.
설령 자신이 오해했다고 하더라도 말로 표현한 것은 아니기에 그냥 입 다물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뉴스를 봤다 하더라도 자신의 권위나 자존심을 내려놓고 사과하는 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굳은 얼굴과 냉기 서린 표정으로 한 소리를 하고도 말로 내뱉지 않았다고 아무 가책도 느끼지 않는데 말이다.
거창한 업적을 이룬 위대한 인물이 아니어도 그 교감선생님이 왜 그리 큰 사람으로 느껴질까!
교감선생님이 오해해서 나에게 사죄했는데 왜 내가 고개가 숙여질까!
교감선생님도 이제 아주 고령이 되셨을 텐데……. 석양빛 속에서 고고하게 솟아 있던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것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나와 아주 가까이에 있었던 큰 바위 얼굴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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