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때 야간자습을 하다가 정전이 되는 날이면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교실 베란다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수다를 떨었다. 수다의 결론은 늘 진학걱정이고 진로문제였다. 정전이 되어 온 세상이 까만 어둠뿐이기에 밤하늘에 별이 더 반짝였다. 별을 올려다보며 선생님이라는 꿈을 별처럼 선명하게 가슴에 새기곤 했다.
꿈을 이루어 교직 생활을 하면서 참 행복할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잘해서가 아니다. 겸손이 아니라 사실 다 부모님들 덕분이었다.
매년 학부모 총회 때마다
“자기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생님은 엄마입니다.”라고 했던 말은 내 진심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 변함없다. 자기 아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부모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평생을 책임져야 할 사람도 부모이다. 눈앞에 이익보다 아이가 살아갈 앞날을 내다보며 생활습관, 가치관을 생각하는 부모님들을 보며 고개가 숙여지곤 했다.
어느 학교에서 5학년을 할 때 인상적인 두 아이의 부모가 생각난다.
3월 학부모 총회 때에 건의사항으로 “우리 아이에게 궂은일을 많이 시켜 주세요.”라고 했던 A의 아버지가 생각난다. 학부모의 요청에 의해 매일 교실 쓰레기통 비우기, 빈 우유통 정리해서 우유상자 창고에 갖다 놓기 등을 시켰다. 행사로 인해 교실 청소를 하지 않고 하교할 때도 A는 스스로 남아서, 교실 정리하는 나를 도와주곤 했다. 학년을 마치는 날 아이들이 다 돌아간 빈 교실에 스스로 A만 남았다. 끝맺음을 잘하고 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교실 정리를 하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노고를 칭찬하며 힘들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다.
전혀 힘들지 않고 오히려 쓰레기 버리고 오가며 바람도 쐬고 몸도 움직여서 운동도 되고 좋았다고 했다. 학년을 끝내며 진심을 담아서 작은 상을 주어서 보냈다.
며칠 뒤, 대학교수였던 A의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중국에 교환 교수로 가게 되었는데 중국으로 출국하기 전 공항에서 감사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온 가족이 바쁘게 살아야 하는 외국 생활에 A가 감당해야 할 일의 훈련을 시켜줘서 감사하다는 말씀이었다. 내가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A의 아버지 덕분이다.
또 한 사람이 있다. 이름만 말하면 다 아는 유명 언론인의 아들인 B의 엄마이다.
B는 늦둥이였다. 대학생인 누나가 있었다. 귀한 아들이라 엄마는 육아를 위해 방송 작가 일을 그만두기까지 했다. B의 엄마는 자기 아들이 귀한 만큼 다른 아이들도 참 귀하게 보는 엄마였다. 직장 생활하느라 아이들 잘 못 돌보는 엄마들 심정까지 헤아렸다. 지금과 달리 복지가 넉넉하지 않았던 그 시대, 학습준비물을 자기 아들 것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학급 전체 분량을 챙겨 줄 때가 많았다.
자신의 경험을 살려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사명감을 가지고 즐거워했다.
무보수로 1주일에 한 번씩 학교에 나와서 온종일 학교 학습자료실에서 바쁜 교사들의 손이 되어서 복사, 코팅, 자료편집 일을 맡아주었다. 그래도 엄마가 봉사한다고 B를 특별대우해 줄 일은 없었다. 나도 엄마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방학을 앞두고 비상연락망을 만들 때였다.
5학년쯤 되니 모든 아이들이 다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다. 출석 번호대로 자기 앞뒤 아이 핸드폰 번호로 비상연락망을 만드는데 A와 B만 핸드폰이 없었다. 내심 놀랐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도 아닌데 부모가 너무 엄격하고 고지식한 기준으로 훈육하는 것이 아닌지 짐작했다.
A와 B를 방과 후에 남겼다. A와 B가 얼마나 핸드폰이 갖고 싶을까 생각했다.
핸드폰 액세서리 하나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아이들이었다. 학급 아이들 실태를 부모님께 알려주고 A와 B가 느낄 소외감을 생각하며 핸드폰을 사주도록 도움을 주고 싶었다.
내 예상은 완전 빗나갔다.
A와 B는 모두 핸드폰이 필요 없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은 학원을 많이 다녀서 부모님과 연락할 일이 있어서 핸드폰이 필요하지만 자기들은 학원도 다니지 않고 연락할 일이 있으면 집전화를 이용하면 된다고 했다. 내가 오히려 머쓱해졌다.
친구들이 다 가지고 있는 핸드폰인데도, 필요하지도 않은데 굳이 가질 필요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들이 대견스러웠다. 비상연락망에서 누락된 그들은 비상시에 내가 직접 연락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핸드폰이 있고 없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무조건 친구 따라 핸드폰을 가지고 싶어 할 수도 있는 아이들인데 그들은 미동도 없었다.
수업시간에도 정답을 말하려고 하는 보통 아이들과 달리 자기 생각을 자유스럽게 말하려는 그들이었다. 때로 아이들에게 엉뚱하다는 말도 들어서 별명이 4차원 B였다. 시험점수나 등수에 전전긍긍하지 않는 그들의 당당한 멘털은 어디서 온 것일까? 부모의 가치관이나 삶과 아이들이 줄 긋기가 이어졌다.
담임과 학부모 관계여서 조심스러워 일정 거리를 두고 지내다가 우리는 퇴직하고 더 가까워졌다. 생각의 코드가 맞아서 학부모와 교사라기보다 그냥 부담 없이 소통의 즐거움을 나누는 사이였다. 코로나를 기점으로 오래 만나지 못하고 있다. 고마움을 넘어서서 지금도 그리울 때가 많다.
나처럼 교사를 꿈 꾸며 현직에 나왔을 서이초등 선생님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정말 가슴이 아리다. 교사의 참 맛을 느끼기도 전에 교직을 포기하고 생을 마감하기까지 한 선생님의 절망이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의 본성이 얼마나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가 아닌 ‘어른들이 달라졌어요’이다.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얽히고 설킨 사회적인 요인으로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를 대하는 부모들의 마인드가 달라진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의 진심이 통하고 믿어 주는 것보다 더한 힘이 있을까 싶다. A와 B 부모를 생각하면 사회적인 지위를 앞세우며 교사에게 갑질을 한다는 요즘 일부 학부모와 너무 대조가 되어 빛바랜 사진처럼 다시 꺼내 보게 된다.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이 부모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부모의 무게는 평생 가벼워질 수 없다. 말 안 듣는 것 같아도 아이들은 부모 말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잘 흡수한다. 부모가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아이들도 선생님 말을 받아들이는 강도와 태도가 다르다.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교권을 법적으로 강화시키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우리 부모들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교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아이를 위해서 교권을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진심을 믿어주고 진심이 통한다는 것이 교사에게 자부심 되고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결국은 아이들에게로 쏟아지는 열정이 된다.
부모가 가장 좋은 선생님이 될 때에 교권도 바로 서고 아이들은 바로 자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선생님, 좋은 학부모가 더 많다고 믿고 싶다. 세상을 떠난, 못다 핀 선생님의 꽃이 다시 아름답게 피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