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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신옥 Nov 12. 2020

멀리서 볼 땐 희극이었는데

~ 가을 햇살을 타고 온 천사 ~

 최근 소문난 뇌섹 개그우먼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뉴스를 보며, 평소에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직접 만난 적도 없는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를 통해 웃음과 밝은 에너지를 얻기도 했기에 참 허망했다. 한 줄기 차가운 바람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고 머릿속에서는 낙엽이 떨어져 나뒹굴었다.      

 


 한 때 일주일을 시작하기 전인 일요일 밤마다 TV 개그프로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천연덕스런 아줌마 연기는 항상 웃음을 빵빵 터뜨렸다. 실제상황을 방불케 했다. 연기 실기시험도 하기 전에 얼굴만으로도 개그맨 시험에 합격했다고 못생긴 얼굴을 부각하면서도 당당해서 웃음에 어우러진 긍정의 에너지를 나눠 주곤 했다.  거기다 소위 명문대를 졸업할 정도로 공부까지 잘한 뇌섹녀이기까지 하니 참 멋있는 그녀였다.      

 


 일요일 밤 프라임 시간대를 차지한 그녀의 개그는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에 대한 불안을 잊게 하고 일상에 대한 긴장을 풀고 잠자리에 들게 해 주었다. 

멀리서 바라본 그녀의 삶은 희극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TV 속의 그녀였다.  



 TV 속에서는 겉으로 웃고, 남을 웃길 수까지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꺼지고 오롯이 자신의 모습과 삶을 대면할 때마다 자신만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문제 앞에서 얼마나 절망하고 괴로웠을까.       

 우리가 웃음을 머금고 잠자리에 들 때, 그녀는 단순히 삶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마주하고 잠을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 

생각하면 가슴이 자꾸 아리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초긍정 에너지를 나눠준 그녀가 세상을 포기했다.

멀리서 보면 희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오롯이 가슴을 두드린다.     

 

 멀리서 나를 본 사람들은 내세울 것 없는 나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은  ‘살면서 천사를 많이 만난 것 같다’고 부러워한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뜻밖의 천사를 만나 의외로 일이 수월하게 해결되었으니 별 고생도 없이 살아왔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다. 브런치에 ‘내가 만난 천사’라는 글을 쓸 때 나도 사실 마음에 걸려서 주춤거리곤 한다. 늘 도깨비방망이를 두드려서 뚝딱 일이 해결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을지, 더 오버하면 자랑으로 비치지는 않을지 염려되는 부분이다. 사람들의 부러움은 내가 TV 속 그녀를 바라본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글 속의 나는 글 속의 나일뿐이다. 

내 삶의 극히 일부분이다. 어쩌다 한 번 시간 날 때  TV 화면으로 그녀를 봐온 것처럼, 다른 사람도  어쩌다 글 속에서, 멀리서 바라본 내 모습일 뿐이다. 


 천사를 많이 만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끔 해주는 대답은 “그만큼 가까이 아는 사람들 중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 아니냐고 쓴웃음을 짓게 된다. 나도 뒤늦게서야 내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 새삼스러워 보였다. 사소한 것까지도 남을 배려해주고 도와준 사람들이 정말 ‘내가 만난 천사들’이었다.



 퇴직하고 시작한 브런치 작가 소개에 쓴 것처럼 글을 잘 써서가 아니라 내가 만난 천사들을 기억하고 저장해 두고 싶었다. 특별히 천사를 많이 만나서 고생 없이 살아온 것이 아니다. 소위 ‘아닌 사람’들 생각하며 글을 쓰기엔 세월이 아깝고 내 정신 건강이 감당하지 못한다.      

 이왕이면 좋은 사람들을 떠올려보고 싶었다. 글을 쓰는 순간이라도 사그라져 가는 그들에 대한 고마움의 불씨를 되살려 보고 싶었다. 그들에게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실어서 글을 쓴다. 그러다 보면 그들이 남긴 따뜻한 불씨가 살아나서 내 삶의 찌꺼기들을 태우기도 한다. 그 불씨에 쓸데없는 생각들이 사그라진다. 글을 쓰다 보면 몰입이 되어 잡념이 사라진다. 은혜에 감사하는 글이 내 마음을 헹구어 주는 것이다.      

 


 나도 가까이서 보면 다르다. 막상 브런치를 해오면서 때로는 갈등이 생길 때도 있었다. 정말 나의 글은 쟁쟁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 앞에 내놓기 부끄러운 글이었다. 출간도 하고 강의도 하고,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전문 작가들을 쳐다보면 나는 일기장 속으로 숨는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글을 잘 써서가 아니라 내가 만난 천사들에 대해 쓰고자 시작한 일이 아닌가.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을 한다. 

내가 꿈꾸었던 삶, ‘감사로 점철된 삶’을 이렇게라도 이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삶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어쩌면 다행이다.      

 

 특히 무엇이든 멀리서 보는 것은 사실과 다를 때가 많다. 

꼭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TV에서 소개되는 맛집을 막상 가서 보고 TV와 다른 분위기와 맛에 실망을 하기도 했다.  그 역시 TV 속 맛집이었다. 역시 먹어봐야 맛을 안다. 우리 삶도 그 나름대로 맛을 내며 사는 것이기에 멀리서 TV로만 봐서는 전부를 안다고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뒤에서만 봐도 모른다. 

어떤 지인이 말했다. 젊은 부부가 아이를 목마 태우고 가는 모습이 마치 아름다운 액자처럼 보였단다. 다복해 보여서 너무 부러웠단다. 바쁘다며 아이들과 놀아줄 여유가 없는 남편이 몹시도 원망스럽고 자기 아이들한테 미안했다. 마트에 도착해서 보니 목마를 탔던 아이는 걷지 못하는 장애아였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한다. 물론 장애아여서 불쌍했던 것이 아니다. 뒷모습만 보고 남편을 원망하고 자신을 초라하게 생각한 것이 죄책감이 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함부로 비교하고 속단하고 말할 수 없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희극인인 찰리 채플린이 말했듯이 

"삶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멀리서 보면 비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희극일 수도 있다. 멀리서 남이 보기엔 불행해 보여도 정작 본인은 감사하고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저 “오늘 이 순간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결정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나의 삶이 되는 것이었다. 


 딸의 악성 댓글에 일일이 답글을 달아주며 딸의 방패막이가 되어준 그 개그우먼의 아버지, 혼자 보낼 수 없다고 함께 죽음을 택한 어머니, 그녀는 남다른 부모의 사랑을 받았지만 삶은 오롯이 자신의 선택이었다.     



 우리는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그냥 사는 것이다. 너무 멀리도 보지 말고, 뒤에서만 보고 부러워하지도 말고 남과 비교하지도 말고 그저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뛰고 날며 사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날은 뚜벅뚜벅 걷기도 하고, 어떤 날은 걸을 수 없어서 앉아서 뭉개기도 하며 사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무엇을 보고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 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선택이다.     



 가을 햇살이 좋아서 배랜다에 이불을 널었다. 30초 한 말이 30년 간다고, 뜬금없이 가슴에 남아 있던 막말이 떠올랐다. 억울한 감정이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이불을 훌훌 털며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기엔 이 가을 햇살이 너무 아깝다.  이렇게 가을 햇살이 눈부시고 아름다운데 막말에 사로잡혀 하루를 망쳐서는 안 되지…….     

 

 햇살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오랜만에 걸려온 마음 따뜻한 교회 지인이었다.  산책하다가 가을 하늘을 보니 생각나서 전화를 했단다. 그 아름다운 첫 말 한마디에 과장이 아니라 정말 가을 햇살이 가슴속까지 퍼져 들어오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오늘은 그 지인이 가을 햇살을 타고 온 천사였다. 오늘 하루를 살아갈 힘을 북돋우어 주었다. 



 전화 통화가 끝나자 혼자서 읇조렸다. “까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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