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위 Jun 25. 2023

나의 꿈은 항상 너였다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을 보고 울다

앞자리 아가씨 두 명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손수건 같은 거 안 가지고 다니는 나는 손가락으로 눈을 꾹꾹 눌러 눈물을 없앴다.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면서 눈물 바람이라니...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을 보니 나 같이 눈두덩이가 살짝 부풀어 오른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아홉 살짜리 아들의 성화에 이끌려 마지못해 보게 된 영화였다. 그냥 아이들을 위한 흥미롭고 유쾌한 애니메이션이려니 했는데,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기대 이상의 행복감과 여운을 안겨 준 영화는 바로 현재 상영 중인 ‘엘리멘탈’이란 애니메이션이다. 결코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은 ‘물과 불의 기적 같은 사랑 이야기’도 가슴 뭉클했지만, 열정적이고 모험심 많은 ‘불이 진정한 자아와 꿈을 찾아가는 성장 이야기’가 더욱더 감동적이었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유쾌함과 엉뚱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주제 면에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영화이다.     


출처  엘리멘탈


영화를 보던 도중 아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홉 살짜리 아이에게 이 영화의 메시지가 과연 얼마나 전달될까? 관람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성인여성들이었다. 자막 판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애니메이션 치고 어린이 관람객이 너무 없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왜 어른들이 더 많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엘리멘탈’은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 진정한 꿈을 찾아가는 모험과 도전, 성장한 자식과 부모의 피할 수 없는 갈등 등을 담고 있는 어른용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앰버는 아버지가 인생을 걸고 일구어온 가게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가업을 잇는 걸 거부하고 지만, 그런 진심을 외면한 채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착한 딸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웨이드라는 남자를 만나면서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자기만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속의 뜨거운 열정을 깨닫게 다.      


앰버는 그런 스스로에게 분노하면서 꿈을 포기하려 한다.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살아온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는 나쁜 딸이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앰버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은 혼자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럴 필요 없는데.”

아들의 혼잣말에 움찔 놀란 나는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 너는 너만의 꿈을 향해 나아가면 돼. 부모님의 꿈을 네가 대신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야.”    

 

앰버는 결국 부모님의 평생 가업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집을 떠난다.

내 꿈은 가게가 아니라 항상 너였단다.”

앰버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이 고백은 반은 진심이고 반은 거짓일 것이다. 앰버의 아버지에게 평생을 일구어온 가게는 자신의 인생과 맞바꾼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게는 아버지의 삶 자체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러기에 딸이 가업을 이어 가족의 정체성과 명예를 지켜나가 주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자식이란 부모의 바람대로 되지 않는 존재이다.     


출처 엘리멘탈


 꿈보다 소중한 게 자식이다. ‘내 꿈은 항상 너였다.’는 말은 자식의 꿈도 나의 꿈 못지않게 소중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이해와 사랑의 고백이다. 앰버의 아버지는 자신의 꿈과 희망, 어쩌면 자기의 모든 인생을 내려놓으면서 순수하게 딸의 앞날을 축복해 준다. 그런 아버지의 깊은 사랑에 관객들의 눈물샘도 폭발하고 말았던 게 아닐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된다.’라는 말이 막장드라마에 종종 나오곤 한다. 자식의 꿈이나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 욕심 많고 강압적인 부모들의 단골 대사이다.  부모의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자식의 선택을 반대한다니 말도 안 되는 잔인한 협박이지 않은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서도 이런 일은 적잖이 일어난다. 나 역시 아들의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랑을, 무모하다고 생각되는 꿈을 어디까지 믿고 응원해 줄 수 있을까?       


아들은 아홉 살이다. 부모의 꿈과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자기의 꿈을 버리거나 부모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삶 같은 것은 아직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아들에게 앰버의 고뇌와 갈등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나는 아직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부터 현실에 짓눌려 나의 꿈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누군가가 강요하지 않아도 책임감이나 부채감 같은 것들을 등에 이고 그 무게에 휘청거리거나 휘둘리게 되는 것 같다. 영화 속의 앰버처럼 말이다.


아들이 더 자라서도 자기 아닌 타인, 특히 부모에 대한 굴레에 갇혀 괴로워하기보다는 자신만의 꿈과 사랑을 찾기 위해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진심이든 아니든 앰버의 아버지처럼 ‘나의 꿈은 항상 너였다’라고 말해주는 부모가 고 싶다. 자식이 어떤 사랑을 하든 어떤 꿈을 꾸든 그것이 곧 엄마인 나의 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려면, 아마도 아들과 완벽히 헤어질 수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가슴속으로는 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아들의 선택을 복해 주는 엄마가 되어야지.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아들을 떠나보내는 연습을 해야겠다. 하루 하루 조금씩 조금씩!!  


아들아, 나의 꿈은 항상 너였고 너일 거다



매거진의 이전글 핑크 마티니의 Splendor in the gras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