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위 Jun 26. 2023

독서광 엄마를 심었더니 만화광 아들이 나네

책 육아에 진심을 다한 엄마는 만화광 아들을 얻었다

"도서관 가자."

"그래!"

"엄마, 나 먼저 내릴게."

"어, 알았어. 먼저 가 있어 주차하고 갈게."


그리도 도서관이 좋을까? 아들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서관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간다. 여기까지만 보면 책 좋아하는 아들의 모습에 흐뭇해하는 어른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들은 책은 책이되 만화를 좋아한다. 오직 만화책만 보는 지독한 만화광이다.


집에서도 종일 만화책을 읽는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도 어느새 만화책, 밥을 먹다가도 힐끔힐끔 만화책, 간식은 한 손으로 주워 먹으면서 만화책, 자다 일어나서도 만화책, 차를 타고 갈 때도 만화책, 길거리에서도 만화책!  특이한 건 같은 책을 읽고 또 읽는다는 것이다. 만화책이 그렇게 반복해서 읽어도 과연 재미있을까? 누가 만화광 아니랄까 봐. 우리 가족은 서점 나들이를 좋아한다. 그러면 아들은 어김없이 만화책 한 권을 들고 나타난다. 한 번에 두 권 이상은 안 사주기 때문이다. 나는 만화책을 사는 게 처음엔 너무나 아까웠다. 하지만 아들에게 만화책은 고전 못지않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소장해 두고 읽고 또 읽으니 책 한 권당 가성비는 책 값을 뽑고도 남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엄마인 나는 만화광을 키우려고 마음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야말로 책 육아에 진심인 엄마였다. 귀가 생겼는지 안 생겼는지도 모를 시기부터 배에다 대고 책을 읽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아빠까지 동원하여 잠자리에선 그림책 한 권씩 읽어주게도 했다. 태교 음악도 들었지만 사실 책에 더 비중을 두었다. 아이가 막 태어난 신생아일 때도 앞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도 모르면서 그 앞에서 책을 보여주고 읽어주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야말로 아들을 키우는 내내 책과 함께한 시간들이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를 키웠으니 잠자리에서 책을 쌓아놓고 읽어주다 보면 어느새 입에서 단내가 나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때도 많았다. 하지만 꿋꿋이 버텨내었다. 지금은 초등학교 2학년이라 평소에는 책을 읽어주지 않지만 여전히 잠자리에서 2~3권 정도는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다. 이렇게 책육아에 진심인 까닭은 나 자신이 독서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나의 삶이 치유되고 변화하는 경험을 여러 번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 나는 약간의 우울증으로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홀로 지내곤 했는데 방학 때면 그 정도가 더욱 극심해졌다. 밖에 나갈 필요가 없으니 한없이 홀로 침잠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도서관엘 갔다. 관성적으로 매일매일 도서관으로 출근을 해서 하루 종일 책을 읽다 돌아오곤 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독서가 병든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고 어둡고 캄캄한 날들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 같다. 남편이 우울증으로 아플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나와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독서였다. 그 어떤 위로보다 큰 힘을 주었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내가 독서에 매진하자 아픈 남편도 따라서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의 치유에도 커다란 도움이 된 게 사실이다.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의 밑거름이 된 것은 역시나 책이었다.


그런데 나의 마음속엔 아들에 대한 약간의 기대나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책을 좋아하고 열심히 읽듯이 아들도 크면 양서를 늘 가까이하는 독서광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맨 처음 아들이 만화책을 보기 시작했을 때에는 나이도 어리고 긴 글을 읽기 어려울 테니 그러려니 했다. 만화책을 많이 읽다 보면 언젠가 다른 책들도 읽겠지 하며 별다른 걱정도 안 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아들의 만화책 사랑은 점점 더 해졌다. 물론 지금도 나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도서관에 있는 모든 만화책을 다 읽어버려라. 읽다 읽다 질리면 다른 책도 보기는 할 테지.' 하면서 느긋하게 아들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나는 어릴 때에도 만화책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뼛속까지 언어체질인 나는 글이 적은 만화에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만화책조차 정독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이 시간에 차라리 다른 책을 읽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적어도 내 기준엔 만화의 그림들이 나의 상상의 세계를 더 방해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아주 유명하다고 해서 빌려본 로맨스 만화들도 그저 그렇고 시시하다며 마지못해 읽어버렸던 기억이 있다.


내 뱃속에서 나온 아들이건만 아들과 나는 하늘과 땅처럼 다른 취향의 사람인 것이다. 내가 독서광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어 주었다고 해서 아들이 독서광이 되지는 않는 것이었다. 콩 심은 데 콩이 안 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자 허탈함에 피식 웃음이 난다. 자식은 역시 그런 거구나 하면서 말이다. 요즘은 이런 생각도 든다. 만화책을 읽다 읽다 지쳐서 다른 책을 읽겠지 하는 것 역시 나의 욕심이고, 아들은 평생 만화책만 읽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후자에 생각이 미치면 속이 약간 쓰리기는 하다. 그간 내가 한 노력이 조금은 허무하게 느껴져서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어쩔 것인가? 아들이 현재 만화광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시중에 나와있는 숱한 만화책들은 물론이고 아들이 아주 좋아하는 만화책이 하나 더 있는데 과학 OO, 수학 OO이다. 이 잡지를 구독 신청할 때에는 만화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책인지 몰랐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저 양질의 만화책일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집에 만화광 아들이나 딸을 키우는 분이 계시다면 과학 OO, 수학 OO를 추천해 주고 싶다. 가끔씩 나보다 상식이 풍부한 아들에게 흠칫 놀랄 때가 있는데 대개 그 두 잡지에서 보았던 내용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뭐라도 배우는 게 있어서 다행이네.' 하며 독서광 엄마는 만화광 아들을 적당히 받아들이고 산다.


오늘은 월요일이라 도서관이 쉰다고 어제부터 실망했던 아들아,

엄마가 알아보니 우리 지역엔 월요일에 문 여는 도서관도 있더라!

오늘도 도서관에 가서 네 사랑 만화책들과 실컷 놀다 오자.


이전 02화 미니멀라이프 엄마와 맥시멈라이프 아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