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감동적이지도 않다. 보고 나서 한참을 기분이 영 찝찝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진다. 영화를 본 후 며칠 동안 마음속에 조용히 묵혀두었다. 보자마자 내 안에서 올라오는 여러 감정들은 이끼가 잔뜩 낀 바위처럼 지저분하고 불투명해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잔상이 흐려져갈 무렵이 되니 오히려 알맹이에 가까워진 기분이 든다. 이 영화의 제목은 '여자가 사랑할 때'이다. 원제는 프랑스어로 Partir(Leaving)인데, 한국어로 붙인 제목이 영화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여자가 사랑할 때'라는 제목으로 인하여, 영화는 보기 전에도 본 후에도 숱은 오해를 낳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사랑 영화도 흔한 불륜 영화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란 여배우의 연기를 보기 위해 이 영화를 보았다고 했다. 그 말에 깊이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깊은 눈과 얼굴 가득 번진 주름 뒤로 드러나는 희로애락의 감정들은유리처럼 투명해서 단박에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일 것만 같았다. 마음의 숙성을 거치는 며칠 동안 이따금씩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녀의 흔들리던 눈빛들이었다.
이 영화는 대중적인 정서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을지라도 문학적인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소 파격적이고 극단적인 주인공의 행동은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녀의 행동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영화에 대한 감상도 천차만별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중의 반응은 자극적 결말에 대한 거부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출처 여자가 사랑할 때(Leaving)
수잔나는 중년의 유부녀이다. 나무랄 것 없는 능력과 재력, 외모까지 갖춘 의사 남편이 있고 사랑하는 아이가 둘이나 있다. 평범한 주부로서 남편과 자식들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여자이다. 하지만 그녀 앞에 어느 날 미래가 없어 보이는 전과자이자 일용 인부인 이반이 나타난다. 그는 다정다감하고 유쾌하며본능에 충실한 남자이다. 수잔나는 자신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이반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고 급기야는 사랑에 빠져 버린다. 영화 포스터의 문구처럼 광풍에 휩쓸려버리고만다. 여기까지는 일반 불륜 영화의 스토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안락하게 살던 유부녀가 권태를 이기지 못하고 순간의 일탈과 쾌락을 꿈꾸며 낯선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설정은 숱한 영화들에서 반복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편은 다른 불륜 영화의 남편들과는 조금 다른 면을 보인다.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편이라면 아내의 배신에 분노하고 절망할 것이다. 사랑이 식은 남편이라면 조금은 무덤덤하게 아내를 놓아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영화 속의 남편은 다르다. 끝없이 수잔나를 원래의 자리로 복귀시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수잔나의 진심은 물론이거니와 본인의 진심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만들어놓은 가족이라는 성을지키는 데에만 맹목적으로전념한다.
그는 완벽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얼핏 보면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남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잔나는 가족 안에서 감옥에 갇힌 듯한 갑갑함을 느껴왔다. 정체불명의 답답함은 단순한 중년여성의 권태가 아니었다. 그녀가 이반과 사랑에 빠진 후 남편이 보여주는행태를 통해 '감옥'의 정체가차츰표면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는 수잔나를 자신의 완벽한 삶의 부속품쯤으로 여긴다. 또한자신의 보살핌에 의해서만 생존할 수 있는 애완동물정도로 치부한다. 명품 그릇에 작은 이가 하나 나가는 순간 그 그릇은 더 이상 명품이 아니듯, 아내의 자리가빠진 자신의 삶은 완벽하지 않다는 강박에 빠져 있다.
출처 여자가 사랑할 때 (Leaving)
'나 없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내뱉으면서수잔나를 무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수잔나를 곁에 두려 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해서는 아니다. 수잔나는 자기를 놓아줄 것을 간청하지만, 남편은 수잔나와 이반을 잔인하게 괴롭힌다. 급기야는 이반을 감옥에 넣으면서 수잔나의 복귀를 촉구하기에 이른다. 수잔나는 돈 한 푼 없이 생계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이반 곁을 지키지만 이반이 감옥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 나서는 모든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영혼 없는 인형이 되어 다시 밥을 차리고 아이들을 보살피고 남편의 잠자리 대상이 되어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수잔나는 총알을 장전한다. 날카로운 총성과 함께 남편은 피를 흘리며 죽는다.
남편을 죽이고 나서야 자유가 된 수잔나는 차를 몰아 이반에게 간다. 둘의 포옹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수잔나는무척이나비극적인 인물이다. 남자가 가둬 놓은 감옥에 살았건만 이제는 살인자가 되어 진짜 감옥에 갇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따금 천국을 가장한 지옥에서 행복한 척 연기하며 살아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지옥에 사는 것보다 더한 고통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말은 잔인하고 극악무도하게 느껴져서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 광적인 유부녀의 정신 나간 사랑 그 이상의 결론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자극적인 불륜영화라는 오명을 쓸 수밖에 없다. 영화의 원래 제목인 'partir(leaving)'처럼 떠남에 대한 이야기, 더 나아가 삶의 자유를 찾으려 하는 한 여자의 몸부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그 과정 속에서 나타난 이반이란 남자는 수잔나 스스로 감옥 같은 삶 속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촉발제 역할을 할 뿐이다.
입센의 '인형의 집'이란 작품이 너무나도 많이 떠오르는영화이고,한국 영화 중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라고볼 수있겠다. 그러나 마지막의 총성은 내내 뇌리에 남는다. 김복남의 잔인한 핏빛 살육에 눈을 질끈 감아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영화든 문학이든 현실과의 개연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기에 그녀의 잔인한 행동에는 찬반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을 거 같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들의 leaving을 조심스럽게 응원해 주고 싶다. 그것은 떠남이 아닌 완벽한탈출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