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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Aug 04. 2023

공감의 시소 위에서 엉덩이를 힘껏 들어 올리자

나와 당신의 공감을 위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아픔을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공감도 어려운 일이기에 '공감 능력'이란 말을 쓰지 않던가? 그런데 나의 혹은 타인의 공감 능력을 측정하기란 무척 어렵다. 어디까지 어떻게 공감하는 것이 정상 범위인지 가늠하기도 어렵고 서로의 공감 능력을 비교하기란 더욱더 어렵다. 아니 애초에 그런 측정이나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면 이따금 궁금해진다. 다른 이의 고통에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선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악한가? 공감의 여부와 선악의 구분은 연관이 있을까?


가까이에 있는 가족을 먼저 예로 들어보자. 평생을 지켜본 결과 나의 어머니는 공감 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분이다. 어쩌면 병들고 나이 들면서 의식 세계가 더욱더 원초적인 차원으로 되돌아가서일 수도 있겠지만 이따금 놀라울 정도로 본인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주변에 병들어 먼저 죽어간 친구들에 대해 말할 때에도 아주 냉정하다. 하지만 본인의 아픔은 아주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세세하게 토로하곤 하는데 아무리 자식이라도 이따금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시어머니가 두 번째 암에 걸려 자궁을 적출해야만 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에도 어머니의 반응은  대수롭지 않다는 식이다. 그때는 내가 끝내 참지 못하고 정색하면서 말했.

"어떻게 엄마는 본인 아픈 것만 그렇게 중요해?"


반면, 시어머니는 공감 능력이 뛰어난 편이다.  본인도 두 번의 암을 겪고 잘 걷지도 못할 정도로 무릎이 아프면서도 늘 우리 어머니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한다.  자주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많이 안 아프기를  기도하고 있다한다. 아픈 어머니나 남편을 보살펴야 하는 나의 고충 대해서도 진심으로 이해하고 배려해 준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내가 안부를 일부러 전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자식인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간에 큰 종양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건 오래 두면 암이 된다더라.'가 끝이었다. 그 한마디 말 이후로 다시 본인의 아픈 이야기만 하염없이 다시 했다. 어머니도 시어머니도 마음속에 들어가 직접 볼 수 없으니 내면의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겉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렇게 극단적으로 대조다.


그렇다고 어머니는 악하고 시어머니는 선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어머니는 무뚝뚝한 편이지만 심성이 여리고 고운 편이라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간섭하는 것이 거의 없다. 반면 시어머니는 살갑고 정이 많고 잘 챙기는 편이지만  타인에 대한 관심과 간섭이 지나쳐 강요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나에게 특별한 관심도 간섭도 없는 어머니와 지내는 것은 편안하지만, 관심과 애정이 간섭으로 치닫는 시어머니와 지내는 것은 불편할 때도 많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는 어머니는 선하고 타인을 자꾸 힘들게 괴롭히는 시어머니는 악하게 느껴질  때도 있는 것이다.


결국 능력의 여부와 선악을 연관 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타인에게 공감을 잘하면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가능성이 커지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이 그 사람의 진심인지 가식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나의 아픔을 안타까워하며 손잡아 주는 사람을 미워할 수는 없는 이다. 우리는 상대의 공감 능력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통해 그들의 진심을 추측하고 평가하게 된다. 아무 표현도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저 인간은 공감할 줄도 모르는 냉혈한이네.'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결국 인간관계에서 공감 능력이란 표현 능력이나 의사소통 능력과 맞물려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대도 모르게 혼자 하는 공감은 아무런 의미도 효과도 없을 것이므로.


출처  Pixabay


공감은 시소에 비유할 수 있다. 시소의 한쪽 끝에는 나에게 공감하는 마음이 놓여 있고 반대쪽 끝에는 상대에게 공감하는 마음이 놓여 있다. 상대에 대한 공감이 커지면 시소는 상대 쪽으로 기울어지고 자신에 대한 공감이 커지면 내 쪽으로 기울어진다. 공감을 잘한다는 건 시소를 잘 타는 것이다. 시소를 잘 타려면 한쪽으로 시소가 기울어져 멈추지 않고 번갈아 가며 오르내리도록 양쪽의 무게를 잘 조절해야 한다. 상대에게 잘해주고 상처받는 것은 상대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시소를 잘 타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대에게만 공감하느라 내 욕망을 외면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출처  관계의 안목, 신기율


출처 Pixabay


예전에 읽은 책의 한 대목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때는 '다정多情도 병이 되곤' 하는 나의 지나친 공감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는 글을 썼었다.  이 책을 통해 나 자신을 먼저 보살핀 뒤에 하는 공감이야말로 상대에게 진정한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누구나 시소 위에 올라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쪽으로 살짝 기운 시소에 올라타 있으면서 이따금 남에게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관계의 안목'에서는 양쪽으로 번갈아가며 시소를 타라고 했지만 나는 자기 쪽으로 무게 중심이 기울어져 있으면서 때때로 상대에게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만약 남에게로만 시소가 기운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진짜로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사람이거나 상대를 지배하거나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한 친절을 베푸는 사람, 그도 아니면 끝도 없이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사람 말이다. 반대로 시소가 자기에게로만 기울어져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남에게 무관심한 이기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소가 정확히 평형을 이루고 있는 사람은 있을까? 있다면 극히 일부일 것이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는 아닐 듯하다. 나와 남 사이에서 정확히 균형을 잡는다는 건 진정한 중용의 경지에서나 가능할 법하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어떠한가? 젊은 시절에는 스스로 음지에 있으면서 음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지나치게 괴로워했다. 아마도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힘들었던 듯하다. 하지만 나의 이런 절절매는 공감으로는 상대에게 어떤 도움도 못했을 것이다. 나의 성숙하지 않은 공감이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알 수 없는 불안감만 안겨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때는 무게 중심이 내게 있지 않았다. 약간은 남에게 기울어져 있는 시소 위에서 나 자신을 제대로 보살피고 사랑하는 법을 몰라 두 발이 허공에 뜬 채로 버둥거리기만 다. 지금의 나는 내게로 살짝 기운 시소 위에 올라타 있다. 그래야만 나를 보살피면서 이따금 남을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소 위에 올라타서 내쪽으로 엉덩이를 지그시 누르고 앉아 있다가 상대가 시소에 올라타면 엉덩이를 들어 올려 상대에게 기울여주면 되는 것이다. 그럼 상대도 나를 위해 슬며시 엉덩이를 들어주리라. 그렇게 서로 핑퐁 하듯 공감을 나누면서 타인과의 관계는 더 행복하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감은 주고받기다. 그러나 내가 중심에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공감은 표현이다. 상대에게로 시소를 기울이고 싶을 때는 확실하게 엉덩이를 들어 올리자. 공감은 내가  먼저다. 이따금 나의 엉덩이가 들기 힘들 정도로 무거울 때는 상대에게 기울여주기를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시소의 주인은 다. 하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시소에 영원히 혼자 앉아 있다면 얼마나 고독하겠는가? 누군가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면 힘들어도 한 번씩은 상대에게로 온마음을 다해 엉덩이를 들어 올려야만 한다.


신나는 공감의 시소를 타자. 오늘도 내 엉덩이는 시소 위에 올라타 있다. 두 발을 땅에 대고 편안하고 안정감 있게!!  당신이 시소에 올라타기 전까지는 말이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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