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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Mar 22. 2023

있지만 늘 없었던 아버지

아버지를 잃다

불러본다


소위


이른 아침 골목길에서

백발의 노인을 만났습니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덜컹

'아빠'하고 내려앉았어요.


다시 보니 그 자리에 아빠는 없었습니다.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입 밖으로 중얼거려 봅니다.

조 용 히

여러 번

'보고 싶어요'라는 말과 함께


전화로도 만나서도 하지 못한 말들이

세상에 안 계시니 참으로 잘도 나옵니다.







어느 날 아침, '아버지'를 닮은 백발의 한 노인이 거리를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순간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지는 듯 덜컹 내려앉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돌아본 곳에 아버지는 없었다. 살아 계실 때에도 돌아가신 뒤에도 내 마음에 아버지는 부재할 때가 많았다. 어쩌면 나는 줄곧 아버지와 이별하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기나긴 이별의 시간에 대해 새삼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모든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애틋하고 사랑 넘치는 관계는 아닐 테니까. 인생의 한 시기를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살았지만 각자의 영혼은 아주 먼 곳에서 상대에게 무심했을 수도 있다. 관계의 무게를 누가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고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 사랑은 넘치는 것도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갑자기 응급실로 실려가신 후,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만개하였다가 하룻밤 비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바닥을 나뒹구는 벚 꽃잎처럼 4년 전 봄, 아버지는 참으로 허망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인순이의 '아버지'란 노래에는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나에게도 아버지는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 동안 미워했었던 존재라는 게 맞을 것 같다. 미워했지만 내 마음에서 밀어내는 것 밖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둡고 우울한 집안 분위기는 내 마음을 병들게 했고 자존감도 바닥까지 떨어뜨렸다. 혼란스러운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건강하지 못한 어른이 된 나는 겉으로는 부모님께 순종하는 착한 외동딸이었지만 마음으로는 한없이 멀리 부모님 곁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냉정한 자식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주사가 심했고 집에서는 부부 싸움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물건이 부딪히고 부서지는 소음,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고성, 정체를 알 수 없는 폭력의 소리들을 문밖에서 엿들으며 홀로 두려움에 떨곤 했다. 조금 자란 뒤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싸움을 말리고 무차별한 폭력을 몸으로 막아내는 역할까지 해야 했다.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따금 술에 취한 아버지를 해하는 끔찍한 상상을 하면서 내 영혼은 서서히 망가져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피해 늘 집을 비웠고, 나는 혼자여서 외롭거나 아버지와 단 둘이어서 고통스러워야만 했다. 길거리에서 소리 지르고 아무에게나 화를 내는 술 취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런 아버지 옆에서 절절 매고 안절부절못했다. 창피하고 무섭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마음에서 아버지를 버려 버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고 응징이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어린 내게 서슴없이 말했다.

"네가 공부라도 못했으면 고아원에 갖다 버리지 뭐 하러 키우냐?"

지금은 안다. 그저 주사일 뿐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평생토록 가슴속에서 거둬내지 못하였다. 그 말이 무서워서 열심히 공부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이 안 드는 국립대학을 골라 들어갔고 한 학기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공부했으며 졸업하자마자 임용고사를 합격해 단번에 교사가 되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내 생일날 낳아주신 부모님께 고맙다며 선물을 사드리는 대학생이었다. 교사가 된 후 받은 월급은 8년 가까이 한 푼도 빠짐없이 모두 다 가져다 드렸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부모님은 내게 통장 하나 만들어 주지 않았다. 물론 용돈도 없었다. 나는 진실로 그 모든 일들을 자식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처럼 부모에게 헌신하는 자식들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엄마가 되자 완벽히 깨닫고 말았다. 나의 부모는 참으로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나는 아버지와 생과 사의 거리로 멀어지고 나서야, 아버지의 존재를 낡은 사진첩 속에서 꺼내어 조금씩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종종 나무를 깎아 장난감을 만들어 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러면 나는 친구들 앞에서 세상에서 하나뿐인 장난감을 자랑하며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그땐 나무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뚝딱 만들어내는 아버지가 텔레비전 외화 속 주인공인 맥가이버처럼 멋지게만 보였다.


사춘기 시절, 허름하고 더러운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가 자전거를 끌고 학교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온 적이 있었다. 나는 친구들 보기가 어찌나 창피하던지 허둥대며 교문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아버지에게 왜 왔냐며 핀잔 섞인 말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해서 잊히질 않는다. 땀에 젖은 아버지의 등은 축축하고 냄새도 많이 났지만  따뜻하고 든든했다. 나는 그날 아버지의 등에서 분명 사랑을 느꼈다.


어른이 된 후,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몸에 병까지 얻고 힘겨웠던 때가 있었다. 일 년에 딱 두 번 명절 때만 마지못해 집에 내려가곤 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힘들면 집으로 돌아와라.”

소 내게 말 한마디를 하지 않는 분이기에, 그 말에 나는 그만 눈물을 왈칵 쏟아버리고 말았다.


빛바랜 추억들 속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서툴렀지만 딸을 사랑하는 진심이 있었던 아버지가 보인다. 훌륭한 아버지는 아니었어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많이 모자란 아버지를 받아들이기에 나는 오랫동안 가슴이 황량하고 척박했었다.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의 가슴밭은 어떠한 사랑도 용서도 보듬고 키워낼 수 없었다. 그저 메마른 채로 오랫동안 딱딱하게 굳어져 있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나를 정말로 버린 적은 없었다. 거칠고 무식한 아버지였지만 막노동을 하고 땀 흘려 번 돈으로 가족들을 먹이고 입혔다.  어린 나를 어른이 될 때까지 키워 주었다. 사랑의 크기를 잴 수는 없겠지만 나에 대한 사랑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음 속에서 아버지를 수도 없이 많이 버렸다.  해묵은 상처들이 쌓이고 쌓여서 더 이상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생을 서로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고, 이렇게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을 하고 말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 안에 있는 아버지를 더 많이 느끼고 만나게 된다. 많이 모자라고 이기적이었던 아버지, 한편으로는 한없이 나약하고 여렸던 아버지, 그냥 한 사람으로 바라보면 많은 것들이 이해되기도 하는 불쌍했던 아버지. 이제는 아버지를 용서한다는 도덕 교과서 같은 말은 하지 않겠다. 돌아가셨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그저 우리는 그런 부녀 사이로 이 에서 만났고 함께 했고 이별했을 뿐이다.  '미워했지만 사랑했고 감사했다.' 상처는 그저 내가 감당할 내 삶의 몫이다. 아버지는 있지만 늘 내겐 없는 사람이었음을 담담받아들일 수 있는 어른이 된 것이다.


아버지의 상실과 그로 인한 외로움에 이제는 작별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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