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편은 책으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앞도 뒤도 꽉 막힌 것만 같은 날들 속에서 나는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게 술이 될 수도 담배가 될 수도 음식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때 내 눈에 뜨이고 손에 잡히고 마음에 와닿는 것은 오로지 '책'뿐이었다. 처음엔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우울증이나 심리와 관련된 책들을 골라 읽었다. 정신과 의사들이 쓴 책들 중엔 본인의 경험담이 담긴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남편과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병들었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했다. 심리학이라곤 수험서를 통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공부한 게 다인 주제에 전문가도 하기 힘든 사람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내겐 그를 이해하는 일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절박하고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아이를 낳고 몇 년간은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책을 펼치면 아이는 아장아장 다가와 조막만 한 손으로 책을 덮어버리고 그림책을 읽어달라며 졸랐다. 아들이 한글을 깨치고 만화책의 세계에 빠져들고 나서야 나의 독서 시간을 조금씩 허용해 주기 시작했다. 내가 책을 읽으면 곁에서 자기도 만화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내 같이 놀아달라며 투정을 부렸다. 그래서 나는 밤잠을 줄여 가며 독서 시간을 만들어냈다.
책을 읽는 순간에는 남편에 대한 걱정에서도 해방되었고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일들이 술술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일부러 예전에 읽지 않았던 자기 계발서들이나 끌어당김의 법칙에 관한 책들도 반복적으로 읽었다. 그야말로 잡식성 독서를 하되 부정적 정서를 불러일으킬 만한 책들은 멀리했다. 과거에는 우울한 소설들만 주로 읽던 나였다. 하지만 그런 건 현재의 내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책에서 읽고 알게 되었다. 경제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주식과 부동산, 심지어 경매 관련 책까지 읽었고, 급기야는 사주 명리학, 풍수지리 책까지 보면서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바꿔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나는 책의 세계로 무작정 빠져들었다.
오로지 책만이 내게는 구세주였고 신세계였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독서에 매달리자 나의 마음은 달 아래 떠놓은 신성한 정화수처럼 맑고 깨끗해졌다. 늘 불안이 주변을 맴돌았지만 견딜 만한 정도로 작아졌음은 물론이다. 어찌나 책을 열심히 빌려 읽었는지 도서관에서 '다독왕'이라고 상도 주었다. 나는 열성적인 독서를 통해 남편에 대해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심리학 학위는 없지만 적어도 그에 대해서만은 박사 학위를 받아도 부족함이 없을 만한 경지에 다다랐다. 나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세세히 들여다보았고 그가 왜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의 모든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고 그것은 정말로 효과가 있었다. 내 안에 그와 그의 삶에 대한 이해와 자비가 싹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도저히 모든 걸 받아들이거나 용납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책이 나의 내면 그릇을 더 크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나의 독서가 그에게 끼친 영향이었다. 눈만 뜨면 책을 읽는 나를 신기해하던 그도 차츰 나에게 동화되기 시작했고 도서관에 가면 한두 권씩 책을 빌려오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 역시 정해진 분야의 독서만 하지는 않았다. 경제 도서를 읽기도 하고 심리학 책을 읽기도 하고 인문교양서를 읽기도 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엔 루이스 헤이의 '긍정확언'을 한 장 한 장 정성껏 필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잔잔한 호수에 일어난 파문처럼 그의 내면에도 소리 없이 조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그의 독서로부터 예감할 수 있었다.
그에게 한 번도 독서를 강요한 적은 없었다. 누군가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보면 그 대상에 대해 궁금해지고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나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그에게 자극을 주었다. 책에서 읽은 감명 깊거나 인상적인 이야기들을 잡담하듯 들려주거나, 빌려 읽은 책을 식탁에 며칠 동안 전시해 두는 정도의 작은 노력을 기울였을 뿐이었다. 그러자 그 어떤 설득이나 강제 없이도 그는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내게 물들어갔다.
책을 읽는 것이나 기도를 하는 것은 명상과 비슷한 효과가 있다고 들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중에 종교에 흠뻑 빠져서 밤낮없이 기도를 올리고 그것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고 극복해 나가는 사람들이 꽤 많다. 끊임없는 독서는 쉼 없는 기도와 같다. 독서는 나와 남편이 개펄 같은 땅에서 더이상 휘청거리지 않고 똑바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책은 단순한 치유가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단초였던 것이다.
놀라운 변화는 그렇게 한 권의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