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움츠러든다. 괜스레 눈치를 보게 되고 답답해서 숨이 막히기도 한다. '당연히'라는 말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를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틀에 가두어 버리고 옴짝 달짝 못하게 만드는 말 '당연히'. 그 틀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스스로 고장 난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잔인한 말 '당연히'. 나는 '당연히'의 뻔뻔함과 무자비함에 반기를 들고 싶다.
당연히,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요!
평생을 '당연히'의 감옥 속에서 살아온 것 같다. 딸이라면 당연히, 학생이라면 당연히, 여자라면 당연히, 교사라면 당연히, 공무원이라면 당연히, 엄마라면 당연히, 아내라면 당연히. 당연히!! 당연히는 정말 끝도 없이 내 삶의 트랙 위에 나타나는 허들이었다. 아무리 넘고 또 넘어도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당연히'.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고구마 열 개는 물 없이 삼킨 듯 가슴이 답답했던 것도 이런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삶에 대한 연민과 분노 때문이었다. 그래도 벗어날 수는 없다. 당연히 해야 할, 또는 당연히 지켜야 할 일들이 우리 앞엔 태산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다.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도 꾸역꾸역 오늘도 '당연히'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야만 한다. 그게 우리의 운명이다.
그럼에도 가끔은 삐딱해지고 싶다. 나는 그냥 나일 뿐이라고 외치고 싶다. 실상 인생의 팔 할은 온순하게 '당연히'의 세계에 복종하면서 살아왔지만 말이다. 아주 작은 일탈이 회색 빛 인생에 작은 무지개를 드리울 수 있다. 딸 같지 않은 딸, 학생 같지 않은 학생, 여자 같지 않은 여자, 교사 같지 않은 교사, 공무원 같지 않은 공무원, 엄마 같지 않은 엄마, 아내 같지 않은 아내. 그럼 뭐 어떤가? 수많은 비난의 말들을 발로 걷어차 버리고 그냥 나 자신으로 살아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세상에서 당연하다고 규정지어 놓은 것들에는 다분히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속성이 잠재되어 있다. 세상이 다루기 편하고 만만해야 한다는, 세상에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세상이 바라는 대로 말없이 따라야 한다는 잔인한 요구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당연히'의 세계에 완전히 속한다는 것은 온전한 나를 잃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내 학창 시절엔 두발 단속이란 게 있었다. 놀랍게도 귀밑 10cm. 단속의 기준점이 필요했기에 정해 놓은, 학생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머리 길이 귀밑 10cm.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당연히'. 그 길이는 너무도 애매해서 많은 여학생들이 커트도 아니고 단발도 아닌 머리로 못생김을 견뎌야만 했다. 학생이라면 공부만 해야 하고 머리를 길러 예쁘게 꾸미고 다니는 따위의 행동은 학생답지 못하다는 '당연히'가 있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교사가 되었을 때도 두발 단속은 존재했다. 두발 단속을 하는 날에는 모든 아이들이 자리에 서 있고 교사는 자를 가지고 다니면서 머리 길이를 재었다. 끔찍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학생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학생들의 머리 길이도 색깔도 자기 맘대로인 요즘 세상에서 그때의 일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세상의 그런 일'이로 치부될 '당연히'일 뿐이다.
'당연히'도 시간이 흐르면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내가 어릴 적엔 적어도 어른이 되기 전까진 순결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세상도 사람도 그대로이고 그저 긴 시간의 다리만 건너왔을 뿐인데 지금은 텔레비전 방송에서도 공공연하게 '피임약' 광고를 하고 있다. 당연한 게 대체 뭔가? 엄마는 평생을 나 때문에 이혼하지 못했다고 한탄했지만 요즘은 엄마이기 때문에 이혼하지 않는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엄마라면 자식을 위해 모든 걸 참고 견뎌야 한다는 '당연히'도 이젠 변했거나 사라졌기 때문이다.
천지가 개벽한 것 같이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도 또 다른 '당연히'들은 존재한다.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당연히'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거나 못났거나 틀렸다며 내치려 한다. 나는 결코 그 수많은 '당연히'의 세계에 적합한 인물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안간힘을 다해도 늘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당연히' 속에 머물러야 한다. 내가 딸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사회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얼마나 잘 해내고 있는지 굳이 평가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나로서 최선을 다하면 그뿐이다.
나에게 더 이상 당연한 것들을 강요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고 싶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강요는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하지 않았던가? 나는 세상의 눈치를 보며 언제나 당연한 자리에 머물고 싶어 했다. 그만큼 나로 사는 것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를 진짜로 사랑하진 못했나 보다. 김창옥의 강연에서 들은 적이 있다.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 보아주는 것, 그것은 신이 나를 보는 방식으로 나를 보는 것이며, 우리는 그런 눈앞에서비로소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고 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내가 먼저 '당연히'의 세계에서 한 발 정도는 빼내야 한다.
두 발을 다 담그고 쩔쩔매며 언제나 패배자인 것만 같은,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