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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Jan 24. 2024

차마, 거절할 수 없었어.

어리석은 '차마'가 아닌 아름다운 '차마'도 있었을 것이다.

차마

- 부끄럽거나 안타까워서 감히


세상엔 냉정하게 지나쳐버릴 수 없는 일들이 참으로 많다. 특히 나는 거절을 하지 못한다. 거절하는 순간의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을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절을 하더라 최대한 우회적으로 돌려서 하니 상대가 그 뜻을 못 알아듣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서 예전보다는 거절의 요령을 터득했지만, 여전히 리한 요구나 부담스러운 부탁도 대놓고 거절하지 못한다. 거절은 내겐 정말로 어려운 삶의 기술 중 하나이다.


'차마' 어원은 '참다'라는 말이다. 참다는 무언가를 억누르고 견딘다는 뜻이다.  차마 뒤에 어떤 말이 따라오든 그것을 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고 난처할 때 우리는 '차마'라는 부사를 사용한다.  내가 손해를 보거나 불편을 겪을 때도 있지 차마 거절하지 못해서 혹은 차마 외면하지 못해서 꾸역꾸역 그 일을 하고야 마는 것이다. 어떨 땐 그런 자신을 조금 바보 같다고 여기면서도...

 

차마, 거절할 수 없었어.




거절을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에게 친구들이 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OO이가 그려줬어. 그래? 나도 그려달라고 해야지. 처음엔 흔쾌히 그려주었지만 친구들의 요구는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고, 어느새 아이는 수업시간에도 쫓기듯 그림만 그려대고 있었다. 마음속에선 '이젠 제발 그만하고 싶은데.'생각이 강렬하게 올라왔지만 끝내 거절의  한마디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아이는 그런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평판이 별로 좋 않은 친구가 있었다.  아이는 그 친구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 친구와 단짝이 되었고 점심도 함께 었다. 그런데  밥을 먹을 때에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거나 영어 공부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유별난 면 때문에 친구가 없는 아이였던 것이다. 아이는 자기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친구의 행동 상처를 받았지만 친구 앞에서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못했다.


수능 시험을 보자마자 친구가  아이가 가려고 마음먹은 지원하겠고 말했다. 분명히 오래전부터 기에 가겠다고 말해왔던 건 아이였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친구의 바람차마 저버릴 수가 없어서 아이가 먼저 과를 바꿔 지원했다. (그 대학은 지역에서 대표로 뽑혀야만 지원할 수 있었다. 과마다 지역별로 정해진 티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성적이 더 높다는 걸 알기에 차마 친구와 같은 과에 지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친구는 막판에 대학을 갑자기 버렸아이는 양보한 보람도 없이 자신이 원하던 꿈마저 잃 말았.


 아이가 바로 나였다. 거절하지 못하고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다상처받거나 피해를 입는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착한 게 아니라 그저 바보일 뿐이라며 자책도 많이 했다. 거절하지 못하는 마음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측은지심이나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는 선한 마음도  있지만, 거절하면 상대가 나를 싫어하거나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나란 사람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남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더 크게 신경 쓰며 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벽 뒤엔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 벌벌 떨던 어린아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부모님의 불화와 다툼 속에서 늘 불안에 떨던 아이. 부모의 잦은 부재와 언어폭력 속에서 진짜버려질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꼈던 아이.  아이에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선 무조건 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가슴 깊숙이 뿌리 박혀 있었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못하고 무리한 부탁도 다 들어주며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는 바보 어른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비슷한 일들은 반복되었다. 심지어 토사구팽 당하는 일들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동안 나도 많이 변해버렸다. 대학 시절 '도를 아십니까?'라며 붙잡는 사람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그들의 아지트까지 따라갔던 나는 이제 신용카드를 만들라거나 보험을 들라는 부탁들 냉정하게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남에게 미움을 받을까 봐 두려워 억지로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경우도 현저히 줄어들다. 하지만  이따금 내가 정말로 현명해진 건지 그저 영악해진 것뿐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다.  존재 자체로 무해한, 어쩌면 조금은 유익한 인간이었을 어린 시절의 내가 예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한 일들에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마음'필요하다. 내가 차마 거절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 속에도 분명 어리석은 '차마'가 아닌, 아름다운 '차마'가 섞여 있었거라고 믿는다. 나의 양보와 배려에 누군가는 분명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타인에 대한 선의는 굳이 참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 안의 '차마'가 때때로 나를 힘들게 했을지라도 세상에 따뜻한 온기 한 줌 불어넣어 주기도 했 거라고 자위하

깊은 밤, 어린 시절의 나를 힘껏 안아 .


차마, 거절할 수 없었어.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어.


출처   무아

#차마

#부사

#공감에세이

#거절

#양보와 배려

#차마 거절할 수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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