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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Jan 31. 2024

하필, 내게만 이런 일이 닥칠 게 뭐람

그녀들의 '하필'이 눈 녹듯 녹아내릴 봄날을 기다리기로 한다.

하필

 - 다른 방도를 취하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꼭.


 '하필'은 원망의 마음이 가득 느껴지는 부사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벌어졌을  우리는 '하필'이라며 탄식한다. 하필 내가, 하필 지금, 하필 여기서! 머피의 법칙이란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이상하게 내게만 불행이나 불운이 자주 들이닥치는  같이 느껴지는 법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에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반대로 나여야만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무언가가 일어났고 나는 거기 있었을 뿐이다. 하필.


 우리는 알고 있다. 머피의 법칙이라는 것도 확률의 세계에선 당연한 결과일 뿐이고 나만의 불운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살면서 부딪히는 많은 불운에 대해 왜 '하필' 나여야만 하냐며 가슴 치며 원통해하곤 한다. 특히 비극적인 겪었을  그 원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경우엔 지독한 원망이나 한탄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나라도 그러할 것이다.


 하필, 내게만 이런 일이 닥칠 게 뭐람.




 내 옆엔 두 명의 나이 든 여자들이 있다. 바로 엄마와 시어머니이다. 그녀들은 부모라는 이름으로 내게 왔고 부모라는 이름에 가려져 자세히 볼 수 없었던, 나와 같은 여자이다. 특히 엄마는 여자로 보기 힘든 존재였다. 나를 낳고 젖을 먹여 키운 모성의 벽 앞에서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발가벗은 어린애로 있어야만 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더 이상 엄마의 젖가슴을 그리워하지 않게 된 순간부터 내겐 엄마도 사람여자가 되었다.


 두 여자는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어찌 보면 물과 기름처럼 서로 이질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두 여자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필'시작해'하필'로 끝나는 신세 한탄평생 동안 입에 달고 살았다는 것이다. 특히 그녀들이 공통적으로 원망하는 대상은 남편이었다. '하필'이 남자랑 결혼해서로 시작하는 그녀들의 한탄 복사판처럼 닮아 있었다. 물론 그녀들의 남편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녀들에게 남편이란 존재는 '하필 내 인생에 들어와서 나를 일평생 힘들게 한 나쁜 남자'일 뿐이니까.


 어릴 적 나는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아빠와 헤어지지 않는 것일까? 스스로 삶을 개척하지도 않으면 답답한 한탄만 늘어놓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두 사람의 피를 물려받고 태어난 자식에게? 엄마의 '하필'을 귀에 박히도록 듣고 자라며 스스로 다짐했다.

 '하필이란 게 어디 있어? 그렇게 불만이면 모든 걸 바꾸든지, 바꿀 수 없다면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야지. 난 비겁하게 원망만 하며 살진 않을 거야.'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시어머니도 나를 붙들고 엄마랑 똑같은 말을 는 게 아닌가? 그쯤 되고 보니 한국 여자들 대부분이 '하필' 중독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전부는 아니어도 상당히 많은 여자들이 '하필'의 수렁에 빠져  것만 같았다.


 그럼 나란 여자는 어떠한가? 솔직히 말해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남편의 우울증으로 마음이 지칠  때면, '하필 나는 이런 남자를 만났을까? 세상엔 건강한 사람도 많은데...'라며 가슴 서늘한 원망을 품어보기도 했었다. 다만 내가 두 여자들과 달랐던 점은 자식 앞에서만큼은 절대로 그런 한탄을 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것이 자식에게 얼마나 잔인한 독되는지 몸소 경험했기에 절대로 같은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역시 '하필'의 덫빠진 적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구차한 변명일 수도 있지만, '하필'은 모든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나약함이고, 밖으로 드러낼 수 있는 비겁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강도와 빈도가 중요하고, '하필' 뒤에 자신이 하는 행동들인생의 차이를 만들 뿐이다. '하필 부사 연재를 선택해서 이 고생이야.'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묵묵히 오늘치의 글을 써나간다면 나는 '하필'에 주저앉은 것은 아니다. '하필 이 남자를 만나서 내 인생이 꼬였어.'라고 한탄하면서도 그를 위한 밥을 짓고 맛있게 먹는 모습에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하필'인 것이다. 


 하지만 '하필'에서 헤어 나올 수 없어서 점점 더 깊은 으로 빠져들고만 있다면 문제가 크다. 결국 시들어가는 건 자기 자신일 것이고 소멸해 가는 것 역시 자신의 남은 인생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바꿀 순 있어도 곁에 있는 두 여자들을  비난하거나 설득할 수는 없다. 하필 내 엄마고, 하필 내 시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가슴에선 그녀들이  안타깝고 애처롭다.


 나는 그녀들의 '하필'이 눈 녹듯 녹아내릴 봄날을 조용히 기다리기로 한다. 그때까지는 그녀들에게 순한 눈과 귀가 되어주고, 때로는 마음에 없는 맞장구까지 쳐주면서 그녀들의 '하필' 타령을 공감해 줄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필, 내게만 이런 일이 닥칠 게 뭐람.

그러게나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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