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위 Feb 03. 2024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닐까?

불안을 삼키고 사는 이들을 위한 찬가

혹시

- 그러할 리는 없지만 만일에

- 어쩌다가 우연히

- 짐작대로 어쩌면


 저녁을 먹는 내내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있다.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닐까? 그녀와 며칠 째 통화가 되지 않고 있다. 혹시 나한테 화가 나 있는 건 아닐까?  K는 수시로 걱정한다. 그와 그녀의 마음에 대해. 혹시 자기가 모든 걸 망쳐버린 건 아닌지 두려워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 수없이 반복재생해 보지만, 분명한 건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달라져버린 그와 그녀의 태도에 K의 촉수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혹시'는 점점 몸집을 키워 어느새 '틀림없이'로 변해버린다. K는 불안 속에서 안절부절못하고 동동거린다. 밤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 그런데 다음날 그의 표정이 어제와 달리 부드럽게 변해 있다. 마침 그녀로부터도 전화가 온다. 아무 일 없는 듯 상냥한 목소리이다. 그제야 K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도한다. '그래, 내가 뭘 잘못한 것은 아니었나 봐.'라고 생각하면서.


 K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 역시 K와 유사한 부류에 속한다. 끊임없이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피곤하고 소모적인 일이다. 불안이 많은 사람은   주눅이 기 마련이다. 그러니 K와 같은 오류에 자주 빠져버리곤 한다. 그럴 없다는 알면서도 계속해서 자기에게로 책임화살을 돌리려 한다. 오래된 마음의 습관 때문이다.


'혹시'는 단순히 우연한 사건을 의미할 때 쓰이기도 하지만, K처럼 의심과 추측, 불안을 느낄 때  사용하부사이기도 하다.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닐까? 



 

 나는 불안이 많은 사람이다. 그 불안은 다양한 양상으로 삶의 발목을 붙들곤 했다. 일단 스스로 하는 일들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부족하다. 나의 능력이나 재능을 인정받는 순간에도 스스로 못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심지어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는 내게 글을 쓸 자격이 없다고도 생각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우습다. 내 안에서 나오는 말을 글로 옮기는 것뿐인데 무슨 자격까지 필요했던 것일까?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듣고도 기쁘다기보다는  '혹시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며 한동안 불안해했다. 그렇게 나는 자주 나의 능력을 스스로 깎아내리거나 의심했고 내가 이룬 성과조차도 잘 믿지 못하며 살아왔다.


 불안이 많은 사람은 인간관계에서도 자주 을이 되기 쉽다. K처럼 모든 관계의 문제를 자기의 실수 탓으로 돌리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한 말, 내가 한 행동, 내가 품은 마음 그 어딘가에 '혹시' 엄청난 실수나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있지는 않았끊임없이 걱정하는 것이다. 때로는 나의 잘못을 다그치는 사람 앞에서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잘못했겠지. 미안해.'라며 사과해 버리는 쪽을 선택하기도 다. '혹시 그 사람이 나에게서 멀어지진 않을까?' 하는 불안과 걱정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상처 난 자존심과  자괴감으로 오랜 시간 혼자서 다.  


 그런 내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여전히 불안이 크고 의심도 많으며 극도로 예민한 편이지만, 이전보다는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고 자신감도 가지게 되었다.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이란 책이 있다. 그 책은  예민한 사람에 대한 찬가 같아 읽는 동안 손발이 오글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돌아서면 '혹시' 하며 자신을 의심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무나 큰 도움이 되었다. 불안을  삼키고 예민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끊임없이 '혹시의 미덕'을 알려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랜 마음의 습관은 좀처바뀌질 않는 법이다.


 '혹시'를 삼키고 사는 사람들의 미덕은 과연 뭘까? 자기에게 닥칠 위기 상황을 미리 알아채거나 모면할 수 있다. 불안이 많은 사람은 준비성이 철저한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최대한 모든 걸 미리미리 준비하고 계획하고 확인한다. 그러니 쓸데없는 실수가 적어지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해야 할 일을 다 해낼 수 있게 된다.

 또 '혹시' 하며 끊임없이 상대의 눈치를 보기에 배려 또한 많이 하게 된다. 상대의 마음을 관찰하는 일에 열중하다 보니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쉽게 알아챌 수밖에 없다. 예민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불안하고 예민한 이들은 예술가가 될 소질이 많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인간이든 아니든 주변의 모든 것들이 불안을 일으키는 요소들이다. '혹시'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렇기에 불안은 영감이 되고, 사랑이 되고, 예술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혹시 민감하고 불안한 사람인가? 불안이 미덕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혹시 내가 잘못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은 못난 자기 비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배려의 마음이기도 하다. 지금 당신 곁에 내 마음을 잘 알아주고 작은 도 세심하게 배려해 주면서 자기 일을 티 나지 않게 실수 없이 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불안이 많고 예민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혹시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그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해 주길...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닐까?

아니야, 아닐 거야. 너라면!


#부사

#공감에세이

#혹시

#의심

#불안

#추측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

이전 21화 하필, 내게만 이런 일이 닥칠 게 뭐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