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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Feb 10. 2024

유난히, 따뜻했던 그날들...

누구의 가슴 안에나 있는

유난히

 - 언행이나 상태가 보통과 아주 다르게, 또는 언행이 두드러지게 남과 달라 예측할 수 없게.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그렇듯 사랑했던 것만으로

그렇듯 아파해야 했던 것만으로

그 추억 속에서 침묵해야만 하는

다시 돌아볼 수 없는 그날들

 - 김광석, 그날들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런 날들도 있다. '유난히' 그리워지고 가슴 아파지는 그런 사람, 그런 날들이 있다. 떠올리면 심장 가득 뜨거운 눈물부터 차오르는 추억이 있다. 유난히, 따뜻했던 그날들.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영원히 되돌릴 수도 없는,  시간의 단층 너머로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 날들. 그래서 '유난히' 나를 흔드는 기억 속의 날들!


 유난히, 따뜻했던 그날들...




 어둡고 우울했던 유년 시절, 나는 '버려진 아이'라는 정체성을 온몸에 휘감고 살았다. 실제로 버려진 적도 없으면서 내 안에는 까닭 모를 외로움과 슬픔, 두려움이 언제나 넘칠 듯 출렁거렸다. 그때 나는 나의 우주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어디에서나 온전히 녹아들지 못한 채, 모래처럼 서걱거리기만 하는 내 존재가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졌을 뿐이다. 나는 주로 아주 작은 방에 갇혀 있었고, 그 안에 있는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쉼 없이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는 혼자일 거야. 영원히.'


 부모님의 불화, 동생의 죽음, 엄마와의 가출, 가난, 언제나 혼자인 날들이 만들어낸 일그러진 우주 속에서, 나는 눈의 여왕이란 동화 속 주인공 카이와 같아졌다. 거울 조각이 눈과 심장에 박혀 차갑게 변해버린 카이처럼 웃음도 행복도 모두 다 잃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춥고 시린 날들 가운데에도 가슴에 박힌 거울 파편이 한순간에 녹아내릴 것 같이 '유난히, 따뜻했던 날들'은 존재했다. 간헐적이지만 강렬했던 그날의 추억이 나를 살게 했고, 가슴에 박힌 거울 조각을 스스로 뽑아낼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종종 나무를 깎아 장난감을 만들어주곤 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장난감. 아버지는 나무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뚝딱뚝딱 만들어냈다. 아버지의 손은 언제나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고 손가락 끝은 울퉁불퉁 개구리발처럼 보기 싫게 부풀어 있곤 했다. 그 큼직하고 투박한 손은 유난히 거칠었지만 때로는 유난히 따뜻하기도 했다. 단발머리에 촌스러운 머리핀을 꽂고 있는 어린 나와 시커멓게 탄 얼굴에 허름한 옷을 걸친 아버지가 마루에 나란히 걸터앉아 웃고 있는 어느 여름날의 빛바랜 사진.  그렇게 유난히, 따뜻했던 그날.


 중학생 때였다.  더러운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가 자전거를 끌고 학교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창피함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허둥대며 교문 밖으로 달려 나왔고 아버지에게 왜 왔냐며 핀잔 섞인 말도 했었다.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땀에 젖은 아버지의 축축하고 냄새나는 등에 생전 처음으로 몸을 기대었다. 아버지를 미워만 하는 내가 더 미워져혼자 몰래 눈물 흘렸던 날. 그렇게 유난히, 따뜻했던 그날.


 어머니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움이 미움이 되고 분노가 되었다가 급기야는 모든 걸 포기하게 만들었다. 마음의 풍랑이 거세게 휘몰아친 후 죽음과도 같은 정적만이 감돌던 어느 , 느닷없이 어머니집으로 돌아왔다. 초췌해진 어머니의 야윈 얼굴을 보았을 때 가슴이 아파서 나는 아무 말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한없이 원망스러우면서도 나를 진짜로 버리지는 않아서 고마웠던 날. 그렇게 유난히, 따뜻했던 그날.


 늘 혼자인 나를 살뜰히 챙겨주고 보살펴주던 사람이 있었다. 나랑 이름도 비슷해서 친오빠 같았던 문간방 대학생. 그가 있는 방에 온종일 껌딱지처럼 붙어 있어도 귀찮다 내치지 않고 한결같이 웃어주던 그 사람. 어릴 때 나무에서 떨어져 한쪽 다리를 평생 절게 된 안쓰러운 그 남자. 대학에 입학한 후, 결혼을 앞둔 그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돌아오던 날, 그를 닮아 선하고 맑은 미소를 지닌 그의 애인을 보자 내 안에 남아 있던 미련과 아쉬움조차도 후련히 털어낼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두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면서 돌아서던 날. 그렇게 유난히, 따뜻했던 그날.


 삶의 여기저기를 고운 조각보처럼 덧대어 수놓은 따뜻했던 그날들. 그 모든 날들나의 가슴에 박힌 거울 파편들을 조금씩 녹여내는 기적의 눈물이 되어 주었다. 나의 부모, 나의 친구, 나의 사랑! 내 곁에 머물렀던 그 모든 이들이 나의 겨울이자 결국엔 나의 봄이 되었다.

  

 누구의 가슴 안에나 있는

 유난히, 따뜻했던 그날들...


원작  Boyana Petkova,  모작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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