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 우화 중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남자는 신에게 자기 인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과 바꿔 달라고 계속해서 기도했다. 그러자 신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겪은 불행한 일들을 보자기에 싸서 가져 오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평소에 밝게 웃고 긍정적이던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보자기를 어깨에 지고 가는 것이었다. 신은 사람들에게자기가 원하는 보자기를 선택하라고 했다. 그러자 모두가자신의보자기를 향해 달려갔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의 삶에는 어떤 고통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차라리 이미 익숙해진 자신의 불행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 후로 남자는 다시는 자기 삶을 불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자신만이 견뎌야 할 삶의 무게와 고통이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의 아픔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웃는 얼굴 뒤에 어떤 끔찍한 고통이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말간 얼굴로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 면 혼자 생각하곤 한다.
'이분의 삶의 고통은 무엇일까? 혹시 아주 큰 고통을 감내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원작 Boyana Petkova, 모작 무아
어머니가 응급실에 있을 때였다. 어머니의 지인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곁에서 통화 내용을 엿들은 바로는, 그 지인은 멀리서 병원을 오가야 하는 내 사정이나 돌보아줄 가족이 딸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의 처지 등을 걱정하면서 언제든지 부르면 본인이 와서 간호를 해주겠다고 하는 듯했다. 나는 어머니 곁에 이렇게 좋은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고, 정말로 급할 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부풀어 통화가 끝나자마자 누구인지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혀를 차며 말씀하셨다.
"제 코가 석자인 게 날 도와주겠다고 그래."
그분은 젊은 시절 남편과 헤어지고 혼자서 살아왔는데 불과 얼마 전까지도 간병인을 하며 열심히 돈만 벌었다고 했다. 그러다 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미 말기인지라 수술도 할 수 없어 진통제만으로 고통을 견디고 있다고 했다.
"세상에... 그런 분이면 미안해서라도 간호하러 온다면 말려야지."
"그럼 어디 이 친구를 불러. 근데도 나한테 이렇게 잘해. 전화로 자주 안부도 묻고 내가 입원했다 퇴원하면 맛있는 음식도 사 주고 그래.
"정말 좋은 분이네. 근데 자식은 없어?"
"딸이 있다고는 하는데오래전에 연락이 끊겨서 생사도 모르고 찾을 수도 없대."
나는 깜짝 놀랐다.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 가족도 아닌 사람을 이렇게 진심으로 챙길 수가 있을까 싶었다. 어머니도 중병이긴 하지만 지금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는 상태는 아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딸이라도 있지만, 그분은 가족 하나 없이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텐데 그 고통을 어떻게 감내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엄마, 언제 그분께 맛있는 식사 한 번 대접하고 싶네. 자리 좀 만들어봐요."
먼 곳에 살고 있는 내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분을 만나러 갈 날이 진짜로 올진 모르겠다. 하지만 그분이 조금은 덜 고통스럽게 돌아가시길 빈다.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딸과 만나게 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분이 겪고 있는 진짜 고통을 몰랐다면, 그저 마음씨 따뜻한 사람이 베푸는 친절 정도로 감사히 여기고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분의 호의는 아주 특별하고도 고귀한 것이었다.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품고 있으면서도 다른 이의 고통을 보살피려 했기 때문이다.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할 그분 눈에는 딸 하나만 바라보며 투병 중인 어머니의 처지가 본인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던 것 같다. 누구의 형편이 조금 더 낫고 말고를 떠나 그저 아픔을 함께하려는 순수한 마음이 가슴속에서 일어났던 것이리라.
문득 동병상련이란 흔한 말이 떠오른다. 아픔을 가진 이가 같은 아픔을 가진 이를 더 잘 이해하고 고통을 나누려고 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 담긴 의미를 진정으로 실천한 적이 있었나 되돌아본다. 스스로 깊은 괴로움에 빠져 다른 이의 고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들의 고통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내 안의 고통을 감당하기에도 버거워 눈 돌릴 마음의 여유가 조금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고통스러운 가운데에서도 주변의 고통에 손 내밀어 준 경험도 분명 있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순수한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그 지인분처럼 말이다.
이 우화 속의 남자처럼 나의 고통이 세상에서 제일 크다고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고통의 양이나 무게를 남과 비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듯하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무게를 견디고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세상에 더 큰 고통이나 더 작은 고통 같은 건 없다. 각자의 잔에 담긴 물이 넘치는 날 그 누구라도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1리터의 물이 들어가도 넘치지 않는 사람, 단 1밀리리터의 물이 들어가도 넘치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각자가 살아온 삶의 과정과 내면의 그릇에 차이가 나서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절대적인 것이지 상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따금 고통이 극심해 머리 위에 이고 있는 하늘이 한 조각 빛도 없이 가려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 우화 속 남자처럼 나의 삶을 바꿔보고 싶다는 마음이 잠시 올라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어 어리석은 욕심을 내쫓는다. 누구에게나 이만한 고통은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기로 한다. 일상 속에서 고통을 하소연하거나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살고싶지는 않다. 힘들어도 혼자 울고 세상 밖에 나와서는 그저 웃어 보이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힘들다 해도 자신이 겪어온 고통이 제일 만만한 법이다. 우화의 마지막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불행 보자기를 향해 전력질주했던 것처럼 나도 다시 불행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내 것을 선택할지도 모르겠다. 고통의 경중을 떠나 나의 불행은 이미 익숙해진 것이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견디고 극복하는 방법을 충분히 연습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감당할 만한 고통인 것이다. 신이 주신 나만의 몫인것이다.
살아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아프다. 나도 아프고 곁에 있는 그도 아프며, 마당의 개미와 앞산의 들꽃, 하늘을 떠도는 티끌조차 아프다. 그러니 모든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다정함을 지녀야겠다. 내 안에 고통이 가득 들어차 있을 때조차도 연민의 마음으로 다른 이의 고통에 친절을 베풀어야겠다. 나의 친절이 세상을 돌고 돌아 다시 내게로 되돌아올 것이며, 그럴수록 모두의 고통은 점점 견딜만한 작은 것이 되어갈 것이다.부디 그렇게 현명해지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