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은 뒤에 어떤 말이 나오든 그 상태가 아주 놀라울 정도로 강하거나 정도가 심하다는 것을 강조할 때 쓰는 부사이다. 나는 이토록 뒤에 처음부터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를붙여놓고 이런저런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나가기로 한다. 언어는 곧 삶이다. 머릿속의 생각도 언어이고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생각도 언어이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삶은 자연스럽게 언어가 직조해 놓은 결을 따라 흘러간다. 그러니 '이토록' 뒤에 '아름다운' 같은 단어를 붙여두고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내 삶을 긍정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눈부신 햇살이 비쳐드는 것 같지 않은가?
'Never let me go'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인간에게 장기를 이식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낸 복제인간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예정된 죽음을 그린, 다소 충격적이지만 언젠가 일어날 법도 한 가상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였다. 가장 젊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이십 대에 반복되는 장기 적출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 복제인간들의 삶은 아무리 영화라지만 보고 있기비통했다. 하지만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담담한 시선 때문인지 복제인간들이 자신의 운명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태도 때문인지 영화를 보는 동안 감정의 동요가 그다지 격하게 일어나지는 않았다.
복제인간들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 하나가 돌고 있었다. 진실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커플에겐 장기 적출의 시간을 다만 몇 년이라도 유보시켜 주면서 둘이 함께 지낼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 같건만 복제인간들은 그 소문을 진실로 믿었고 삶을 연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그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 소문은 복제인간들의 삶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빚어낸 허상이자 망상일 뿐이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정해진 때에 죽음을 맞아야 했고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사랑하는 연인이 숨을 거둔후홀로 남겨진 여주인공이 쓸쓸하게독백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막을 내렸다.
"누구도 삶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삶이...
당신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나요?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죽음 앞에서 삶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인간이든 복제인간이든 동물이든 스스로 살아 있음을 인지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은 결코 당연하지 않으며 삶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충분히 살았다고 평가하는 건 어디까지나 타인의 시선과 판단일 뿐이다. 종종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의 죽음을 두고 '호상(好喪)'이라고 표현할 때가 있다. 죽음이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봤을 때 고인은 이미 살 만큼 살았고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100세가넘은 노인에게도 죽음은 마지못해 받아들여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파서 죽든 노화로 죽든 불의의 사고로 죽든 세상에 충분하다고 느끼는 삶은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일부 깨달음을 얻었거나 정신적으로 고매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아주 의연하기도 하다. 자신의 삶이 충분했다고 자족하면서 평온하게 눈을 감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신앙인들 중에는 육신을 버리고 신의 곁으로 가는 걸 축복이라 여겨기쁘게 죽음을맞이하는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삶은 언제나 충분하지 않다. 겉으로죽음에담담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스스로 충분히 살았다고 만족해서라기보다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자각했기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받아들이고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래 살고 싶은 열망때문에 복제 장기를 만들어내는 데 도전하고 있고 성공한다면 머지않아 복제 장기로 새 생명을 얻는 사람들도 생겨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속 이야기가 아주 허황된 것만도 아니다.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엔 자기와 똑같은 유전자로 만들어진 복제인간에게서 젊고 건강한 장기만 가져다 몸에 이식하면서 100세고 200세고 죽지 않고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이도 나타나지 않을까?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이미 내 육신이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렸다는걸 알때이다. 만약 육신이 멀쩡하다면 누가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겠는가?육체의 노쇠를 무기한으로 연기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인간의 삶도 끔찍하게 길어질 게 분명하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똑같이탄식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은아직도 충분하지 않다고. 근데 그런 날이온다면 삶이 과연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삶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유한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시간과 소멸해 갈 육신이기에더없이애틋하고 소중한 것이다. 죽음은 필연이기에 삶이 이토록 아까운 것이다.오십이 가까워오는 내게도 팔십이 가까워오는 엄마에게도 삶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고 그래서 눈물 나게 아름답다. 언제 나에게 죽음이찾아올지는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까닭은 오직 내가살아 있기때문이고 동시에언젠가는반드시죽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는 동안우리는전혀아름답지도않고 의미조차 없어 보이는 고통들에 시달릴 때가 많다. 그럼에도 살아 있는 이 순간순간들은 찬란하게 빛난다. 나는 끊임없이 새로태어나고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는생의 아름다운 순간들앞에서 오늘도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모든 이의 삶을 차별 없이더 사랑하게 해주세요.'수술실에 들어간 엄마를 기다리며 누구에게나 삶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충분하지 않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고 이토록사랑하는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