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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May 12. 2023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진 않더라도

가난은 '주홍글씨'다

우리말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있다. 가난한 것과 똥구멍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 말은 6·25 전쟁이라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말이다. 전쟁 통이니 먹을 것이 제대로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하고, 오랜만에 음식을 먹어도 양도 적고 질도 나쁜 음식을 먹어야 하니 변이 잘 나올 리가 없었다.  어쩌다 한 번 변을 보러 가면 똥구멍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는 데서 이런 관용 표현이 생겨난 것이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을 들으면 왠지 온몸이 쭈뼛하니 곤두서고 항문이 움찔거리는 거 같다. 가난을 이토록 피부에 와닿게 표현한 말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싶다.


출처  Pixabay


나도 가난했다. 암만 그래도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적은 없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전쟁을 겪은 우리 부모 세대에게나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70년대에 태어난 나는 지금처럼 먹을거리가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삼시 세끼 배곯지 않을 만큼은 먹고살았다. 

하지만 나의 내면에는 이상하게도 '가난'이라는 두 글자가 주홍글씨처럼 짙게 새겨져 있다. 어릴 땐 그 글자를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꽁꽁 싸매고 다녔다. 어른이 되어 가난과는 거리가 멀만큼 돈을 벌게 된 후에도 내 안의 '가난'이란 글자는 좀처럼 지워지질 않았다. 나는 가난한 것이 아니었다. 가난하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의 마음이 아주 오랫동안 가난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부자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이름 있는 상표의 아동복을 공주처럼 입고 다니느냐? 집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느냐? 자기만의 방이 있느냐? 장난감이나 전집을 가지고 있느냐? 엄마가 돈 봉투를 들고 담임 선생님을 쫓아다니느냐? 뚜렷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꽤 여러 가지 조건들이 눈덩이처럼 뭉쳐져서 나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 '가난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기억이 가 닿는 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나를 관통하는 자의식의 일부였다.


가난한  내게도 소소한 사치의 경험은 있었다.  학창 시절 용돈이라는 걸 받아본 적 없던 나는 문제집 깡으로 뒷돈을 만들었다. 우리 부모님은 아무리 돈이 궁해도 학교에서 사라는 문제집과 자습서는 사주셨다. 그런데 학교 앞 서점들 정가에서 몇 프로씩을  깎아 주곤 했다. 부모님께는 정가대로 돈을 받아와서 문제집을 사고 나면 내게 소액의 현금이 남게 되는 것이 일명 문제집 깡이다. 그렇다고 거짓말로 책을 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순진한 나는 서점에서 쥐어주는 약간의 잔돈에도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꼈으니까.  

그렇게 해서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는 군것질도 하지 않았고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액세서리도 사지 않았다. 딱 카세트테이프 한 개 값이 될 때까지 참고 참았다가 내가 좋아하는 가수나 영화 ost 테이프를 사서 듣고 또 들었다. 대도시의 명문고를 다닌 나는 유학파 친구들이나 과외니 학원에 열을 올리는 친구들과 경쟁해야 했지만 학원 근처에도 갈 수는  없었다.  좋아하는 음악 테이프를 사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사치 누리며 문제집을 사서 혼자 공부했다. 공부만 잘하면 학교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었기에 가난을 모르는 척 외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늘 주눅 들어  있었다. 반장이 되면 돈이 든다는 걸 알기에 하라고 해도 거부했다. 내 가난의 크기만큼 삶에서도 손해 보고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대학 역시 선택의 기준은 성적이 아니라 오로지 돈이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돈이 안 드는 학교를 찾았.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면서도 오히려 돈을 받으면서 다닐 수 있다고 하는, 교원 양성을 위한 특수 목적 국립대학이었다. 그리고 오로지 그 한 곳에만 응시했다.  자기 성적에 따라  여러 학교지원을 는 친구들이 내심 부럽기도 했지만  외면했다.  내 것이 아닌 것은  일찍부터 쳐다보지도 않는데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대학에 가보니 순수하게 교사의 꿈을 품고 온 학생들이 꽤나 많았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조금 의아하기 시작했지만 그 또한 무시해 버렸다. 가난은 꿈을 이루는 것 따위를 압도할 만한 심각한  결함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작은 사치를 통해 숨을 쉬는 것뿐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덜 먹고 덜 쓰면서 음악 CD를 샀다. 좋아하는 CD를 사기 위해 그야말로 끼니를 거르며 허리띠를 졸라맸다.  

내 삶의 유일한 탈출구음악이었다. 음악이 없었다면 나는 그 기나긴 궁핍의 시간들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었을까? 나의 허기를 어떻게 달래며 살 수 있었을까?  허름한 자취방의 슬래브 지붕 위투둑투둑 떨어지는 시끄러운 빗소리와 나의 CD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는 그야말로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며 청춘의 우울을 위로했다. 한 번 다녀오면 머리카락까지 똥 냄새가 던 푸세식 공용 화장실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들락거리면서도 나는 젊음이 마냥 향기로웠다.  가난도 청춘과 함께라 꽤나 낭만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호기로운 시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역시 돈은 삶의 중심축이었고 나는 벌기 위해 일했고 그 돈으로 가족을 부양했다.  시간 누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스스로 가난에 나의 온 삶을 내맡겼고  그 속에서 관성처럼 살았다. 하지만 이제 와 깨닫건대 가난의 조건이 단지 돈이 많거나 적거나인 것  아니었. 얼마를 벌든 늘 돈을 벌어야만 하는 상황에 끊임없이 내몰린다면 그는 스스로 가난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벌어도 밑 빠진 독처럼 사라지는 돈을 보면서 애초부터 가난을 입에 물고 태어난 자는 미래가 없음아프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 

 

출처 Pixabay


나는 지금 휴직 중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돈을 벌던 한 달 전이나 돈 한 푼 벌지 않는 지금이나 나는 똑같이 가난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도대체 나는 왜 25년 동안이나 돈을 벌어온 것일까? 가난하다는 생각에서 왜 벗어나질 못하는 것일까? 지금의 나는 객관적으로 가난하지는 않다. 가난해서 가난한 게 아니라 가난을 떨쳐내지 못해 가난할 뿐인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는 건 당연하게도 상대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사는 동안  주변에 어마어마한 부자들이 많았던 것도 아니니 상대적 결핍에 오래 시달려온 것도 아니었다.


나는 어린 시절이 삶에 끼치는 영향이 무척이나 지대하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자도 교육학자도 아니기에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내겐 그렇다. 기억 속에 각인된 어린 시절의 풍경들이 있다. 세간 하나 없는 작고 허름한 방에서 물에 만 밥, 그리고 어디에선가 얻어온 시어 빠진 김치로 꾸역꾸역 밥을 먹던 나. 어둡도록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를 혼자 길바닥에 나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던 나.  모르는 아저씨를 아빠의 뒷모습으로  알고 울면서 애타게 부르며 쫓아가던 나.  유치원 앞을 지날 때마다 부러움에 눈이 시려 고개를 돌려버리던 나. 주홍글씨는 별스러운 일들 때문에 새겨진 것이 아니었다.  작은 결핍들이 쌓이고 쌓일 때마다 처음의 흐렸던 글씨가 보다 깊고 진하게 변해갔을 뿐이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가난을 아니, 나의 가난한 자의식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가난은 어쩔 수 없더라도 가난한 마음만은 싫다. 가난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물리적인 삶의 조건일 뿐이어야 한다. 어떻게 해도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가 되어 삶 전체를 장악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 시작이 어린 시절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식이 경제관념도 없이 부자라는 착각 속에 살게 하자는 건 아니다. 그것 또한 살면서 심각한 부작용을 겪을 것이다. 아이는 크면서 저절로 깨달아갈 것이다. 우리 집이 어느 정도 가난하고 어느 정도 부자인지를. 하지만 그 조차도 잘 파악할 수 없는 어린 시절에 각인된 결핍들은 좀처럼 잊히않으면서 긴 시간 자아를 괴롭히기만  것이다.  그것만은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학교에서 일하면서 희한한 경우들을 여럿 봤다. 명품가방을 들고 다닌다는 엄마가 아이의 방과후비는 여러 번 연체시키고, 고급자가용을 끌고 다니는 부모의 자녀가 학비 지원 대상자로 되어있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사회정의 차원에서 인정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부모로서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부자인가? 가난한가? 가난이란 정말로 물리적인 현상만은 아님을 깨닫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과연 그 부모의 아이들은 내면에  결핍을 새길까, 과욕을 새길까? 적어도 건강한 내면을 만들어주긴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핍에 길들여지는 사람도 욕심에 길들여지는 사람도 삶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꾸려가긴 힘들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 내면을 늘 고려하려 하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른이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핍으로도 과욕으로도 가지 않는 건강한 어른이 되도록 어른들이 더 노력해야  일이다. 나는 아이가 아주 어릴 때는 내가 쓸 것을 아껴서라도 아이에게 결핍을 주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건 희생이 아니라 아이를 위한 의무 아닐까? 이제 초등학생이 된 아들은 약간의 경제 관념이 생겼으니 적당히 소비를 조절시키고 있다. 가난한 자의식을 지닌 엄마라 그런지 아들이 사치스럽게 보일 때가 많긴 하다. 하지만 우리는 늘 서로 이야기하며 적당한 중간 지점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나는 아들을 키우면서야 가난이란 주홍글씨를 조금씩 내 삶에서 지워가고 있다. 나도 아이도 함께 건강한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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