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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May 17. 2023

나는 천주교 신자인가? 탕자인가?

나는 믿는다 신을.

나는 엘리사벳이다. 나의 어머니는 미카엘라이다.  남편은 야고보이고, 시어머니는 마리아, 시아버지는 요한이다. 의도한 적은 없지만 나는 천주교 가족의 일원이다.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만이 평생 성당 문 앞에도 가보지 않은 완벽한 이단아였다. 하지만 현재 시부모님을 제외한 모두가 냉담 중인 상태이니 실상은 무늬만 천주교 가족일 뿐이다. 나 엘리사벳은 천주교 신자인가? 누군가 물으면 늘 '그렇다'라고 얘기해 왔지만, 내가 나에게 물으면 마음속에선 물음표가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성당의 미사참례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고백 기도'를 모두 함께 낭송하는 순간 고르겠다. 천주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자랑하고 싶을 만큼 경건하고 아름다운 의례이기 때문이. 모든 신자들과 신부님이 고백 기도를 함께 낭송하면서 실제로 자기의 가슴을 주먹으로 친다. '제 탓이요' 하면서 한 번 치고, '제 탓이요' 하면서 또 한 번 치고, '저의 큰 탓이옵니다' 하면서 다시 친다. 


우리는 살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죄를 짓고 있다. 실제로 짓는 죄도 있고 마음속으로 짓는 죄도 있으며 의식하지 못한 채 짓는 죄도 있다. 이렇게  수 없이 많은 죄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매주 미사에 참여하여 고백 기도를 올리면 형식적으로나마 속죄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제 탓이요'를 말하며 가슴을 칠 때,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감정은 원망도 억울함도 아니다. 고요와 평화가 가슴에 서서히 스며들면서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게 씻겨진다.


리고 미사의 후반부에 아름다운 순간이 한 번 더 기다리고 있다. 모든 신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제에게,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과 앞뒤 있는 사람에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이다. '평화를 빕니다.'라고 소리 내어 말하면서. 그 순간 함께 있던 모든 영혼들은 평화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그 속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 한 시간 남짓한 의례 동안 영혼의 정화부터 평화까지를 한꺼번에 경험할 수 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이 두 순간을 무척 사랑했고 미사를 볼 때마다 가장 기다리곤 했다.


출처  Pixabay


어릴 적 엄마 손에 이끌려 간 성당은 무겁고도 근엄했다. 하얀 미사포를 뒤집어쓴 어른들이 장송곡 같은 성가를 부르며 무릎까지 꿇고 기도하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 항거할 수 없는 순종심과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맹목적인 사랑과 찬미로 가득 차서 수시로 하느님께 기도를 했다. 현실 속의 아버지, 어머니 대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를 마음속으로 애타게 찾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나를 보살피고 도와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얀 화선지에 처음으로 떨어뜨린 먹물 한 방울처럼 신앙심은 진하고 또렷하게 어린 나를 물들일 수 있었다.


어른이 되면서 나는 영리해진 것일까, 영악해진 것일까? 맹목적인 믿음이 있던 자리에 작은 의심의 싹이 트기 시작했고 무엇이든 머릿속으로 납득이 되어야만 가슴으로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삶에서 신의 개입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거나 오히려 부당하게 관여한다고 느껴지는 일들을 목격하면서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잖아.'라는 의혹도 커져갔다. 마음이 흔들리자 기도를 멈추게 되었고 어느새 기도하는 법조차 까맣게 잊고 말았다. 나의 신앙생활은 오랜 세월, 냉탕과 온탕을 들락날락거리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젊은 시절, 나는 수녀원에 들어가려고 했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은 냉담자라는 사실이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도 안다. 하지만 나도 나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판에 남들을 납득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분명한 것은 내가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었다는 것이고, 그것도 매우 절실히 열망했었다는 것이다. 성직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는 수도 성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게 정말로 수도 성소가 있는지 없는지를 분별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그저 나 스스로 수녀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믿으며 그럴듯한 이유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찾아내 가슴에 새기고 되뇌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유들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마는 데에는 아주 작고 사소한 계기가 있었을 뿐이다. 수녀가 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어쩌면 나의 '완벽주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속세의 것을 탐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흔들림을 목격해 버린 순간, 나는 그 빈 틈을 용납하지 했고 날 선 자책이 자멸에 이르게 했다. 하느님이 내주신 시험 문제를 풀지 못한 실패자이자 수도자가 되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낙오자가 되어 좌절했다.


출처  Pixabay


처음의 냉담은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하느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망가진 것은 다시 수습하여 새롭게 시작하기보다 그냥 부숴버리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속된 말로 '이미 버린 몸'이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일탈이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하듯이, 나는 모 아니면 도, 흑 아니면 백으로 극단적이 되었다. 하지만 긴 세월 방랑자로 떠돌다 보니 그런 의미조차도 퇴색해 버렸다. 오히려 나는 점점 내 신앙심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곱슬머리와 오뚝한 코, 깊은 눈, 하얀 얼굴로 형상화되는 예수님의 이미지에 거부감이 있었다. 텔레비전 외화에 나오는 서양의 미남 배우와 같은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아버지'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어색하고 거북했다. 유치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진실로 그것이 내 마음에 항상 걸림돌이 되었다. 차라리 얼굴이 아예 없다면 이질감보단 신비로움을 느꼈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 성경의 교리 역시 몽글몽글한 기름처럼 마음을 겉도는 건 마찬가지였다. 문화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하나도 문제시되지 않을 것들을 나는 혼자서 몰래 불편해했다. '아시아의 한국이란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동양 여자'라는 나의 정체성은 왠지 너무도 서양스러운 천주교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이 OO 막달레나, 손 OO 베드로, 박 OO 안나' 등 순교하신 옛 성인, 성녀들의 이름과 존재를 알게 되면서 거리감을 조금 좁힐 수 있었고, 우리도 분명 하느님의 자식이 맞다고 자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냉담하는 동안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천주교를 다시 바라보니 오래전 덮어두었던 마음속 거부감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내 마음을 굳이 끄집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회피해 왔다는 게 맞을 것이다. 나로서는 신앙이 있다고 해도 거짓이고 없다고 해도 거짓이기 때문이다. 나는 천주교 신자이면서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이렇게 밖에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나는 결코 신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내게는 신이 없다고 말할 아무런 근거도 확신도 없기 때문이다.  



신이 뭐가 아쉬워서 인간한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합니까. 자식한테 "내가 너를 만들었거든, 제발 믿어 줘. 못 믿겠다고? 어떻게 증거를 보여줄까?" 이러는 부모 없듯이요. "네가 선택해라. 내 품에서 자라든, 집을 나가든." 제가 회심할 수밖에 없었던 신의 한 마디였고, 소망 없는 제 인생을 건져내는 신의 한 수였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말이지요, 죽은 후 천국이 정말 있으면 어쩌실 겁니까. 확률은 반반입니다. 있거나, 없거나. 저 같으면 있다고 믿겠습니다. 있으면 가는 거고, 없으면 말고 죠. 안 믿어서 손해 나지, 믿어서 손해 날 건 없잖아요. 없다고 믿었는데 있으면 어쩔 거냐는 거죠.


출처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신아연


https://blog.naver.com/hajin711/222939155767



그리고 언젠가 결국 내가 회귀할 곳도 천주교임을 안다. 예전의 나처럼 온몸과 마음을 완전히 내맡길 수 있게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우리는 종교를 왜 가지는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을 빼고는 종교에 대한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교회에 가거나 성당에 가거나 절에 가지는 않을 것이다. 장일호의 에세이 '슬픔의 방문'에  이런 대화가 나온다.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세요?"

"교회에서는 내가 평생 들어 보지 못했던 예쁜 말만 해 줘."

평범한 이들에게 종교는 그저 삶의 비참함을 견디는 하나의 수단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삶을 희망할 유일한 방법이기에 놓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종교 밖에서 서성이면서 내 삶을 홀로 견디는 게 편하다. 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그렇게 하고 싶을 뿐이다. 언젠가 내 마음을 의탁할 곳이 신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나는 패잔병이 되어 조용히 하느님 품으로 되돌아갈 것이 분명하다. 그러할 것임을 예감하면서도 지금은 완강히 버티고 있는 중이다.


나는 아직 잘난 체하고 싶은가 보다. 신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고 싶은가 보다. 신을 믿지만 신에게 매달리고 싶지는 않은, 그래서 아직은 그 품으로 되돌아가 엎어지기는 싫은 어리석은 탕자인 것이다. 내 힘으로 어찌할 없는 것들에 시달리면서도 신에게 애걸복걸하지 않고 차라리 내가 좀 더 아프게 생을 책임지리라 다짐하는 고집스러운 탕자인 것이다. 그래도 마음 한 편에 믿는 구석은 있다. 신이 나를 결국엔 받아줄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믿음말이다. 신은 내가 아무리 재고 따지고 공격하고 외면해도 결국엔 그 앞에 무릎 꿇고 항복할 나약한 인간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을 것이다.


신의 너그러운 관용 속에서 나는 이대로 조금만 더 방황하려 한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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