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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May 31. 2023

침묵의 힘을 깨닫다

천주교 침묵 피정


피정이란, 성직자·수도자·신자들이 자신들의 영신 생활에 필요한 결정이나 새로운 쇄신을 위하여 어느 기간 동안 일상적인 생활의 모든 업무에서 벗어나, 묵상·성찰·기도 등 종교적 수련을 할 수 있는 조용한 곳으로 물러남을 뜻한다. 피정의 장소로는 성당이나 수도원 또는 피정의 집 등이 이용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Pixabay



30대 초반, 부산의 한 수도원으로 침묵 피정을 떠난 적이 있었다. 십수 년 전의 일이라 기억은 많이 흐릿해졌으나 가슴에 새겨진 강렬함이 있기에 가끔씩 되새김질하면서 살아왔다. '침묵 피정'이란 말 그대로 일체의 말을 하지 않는 침묵 수련을 하는 것이다. 입을 벌릴 수 있는 것은 밥 먹을 때와 하품할 때뿐! 부산의 한적한 외곽에 위치해 있던 그 수도원으로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처음 만난 낯선 사람들이 묵상과 기도, 산책을 하며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3박 4일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더 길었을 수도 있겠다.


첫날, 배정된 방에 짐을 풀면서 나는 왠지 모를 해방감에 기분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세상의 모든 소음들로부터 벗어나니 인간사 모든 근심들도 일시에 내게서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된다니 이보다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싶었다. 며칠 하고 싶은 말 참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하면서 내심 의기양양했다.


기도와 묵상, 산책이 주된 일과였기에 딱히 해야 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침묵은 막막한 시간의 광야 위에 하염없이 홀로 서 있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벗은 민낯의 '나'와 자꾸만 직면해야만 했다. 내 안에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감정과 생각의 찌꺼기들이 걸러지지 않은 채로 뒤섞여 꿈틀거리는 모습을 망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침묵 속에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질 것 같은가.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맞고 어떤 면에서는 틀린 말이다. 쓰레기 더미처럼 부유하는 감정의 덩어리들을 바라볼 때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맑은 내면의 정수를 바라보는 순간은 한없이 평화롭고 고요했다. 문제는 내가 그 두 지점을 수시로 오락가락한다는 것이었다. 내면의 깊고 고요한 곳에 오롯이 집중하기에는 그 시절의 나는 미숙했다.


그래도 얻은 것은 있었다. 그동안 적당히 흐린 물에 몸을 담그고 더러워진 채로 살아왔음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의 삶은 참으로 혼잡하고 어지럽고 시끄럽다. 내 영혼이 얼마나 더러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지 확인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침묵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내 내면의 혼탁함'을 걸러볼 수 있었다. 허나 다시 긴 세월이 흘렀으니 지금의 나는 또 얼마나 탁한 물에 영혼을 담그고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침묵한 채 눈빛만 교류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아주 이색적이었다. 지하철이나 마트나 거리에서 스치는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며 끊임없이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긴 침묵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하다못해 한 건물에서 자꾸 부딪히는 사이라면 인사라도 나누지 않는가. 그들은 함께 있지만 함께 있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에게 무관심해질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눈빛만으로도 몸짓만으로도 내게 무수히 말을 거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세속에서 터득한 나만의 기술을 발휘해 사람들을 평가하고 재단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하는 무언의 말을 읽었다고 믿었고 며칠 동안 혼자서 그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왔을지를 상상해 봤다. 드디어 마지막 날, 피정을 마무리하는 뒤풀이 파티가 열렸다. 침묵을 해제하고 그간 함께한 사람들과 소감을 나누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처음으로 그들과 말을 나누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내가 며칠간 함께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내 앞에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나의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철저히 내 기준으로 사람을 보고 판단했다는 것을 깨닫자, 나의 어리석음이 어찌나 부끄럽던지 혼자서 안절부절못했다. 침묵을 통해 '나는 그동안 세상 속에 섞여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철저히 내 안에 갇혀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청각이 안 좋은 사람은 시각이나 촉각이, 시각이 안 좋은 사람은 청각이나 촉각이 더 발달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소리가 없는 상태에서는 보는 것이 전부이기에 주변의 것들을 좀 더 세밀하게 보고 만지게 된다. 일과 중 한 번씩 수도원 주변을 거니는 산책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매일 그 시간을 기다렸다. 그때가 되면 답답함이 풀리면서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까지도 눈에 가득 차 들어왔다. 며칠 동안의 산책길에서 사귄 동무들이 셀 수 없이 많아졌다. 끊임없이 그들과 마음속으로 말을 나누느라 바쁘고 설레고 달뜰 정도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풍경이 생생히 떠오르는 걸 보면 그때는 정말 온 맘을 다해 주변의 작은 것들을 들여다보았던 듯하다. 침묵을 통해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에 나 또한 소음을 보태고 사느라 소소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소홀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긴 침묵의 시간을 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허락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끄러운 일상을 벗어나 조용히 내 안에 찾아드는 고요와 마주할 시간을 늘려나가는 것은 나의 영적 쇄신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가장 깊은 감정은 항상 침묵 속에 있다.

- 토머스 무어


출처  Pixabay



이 글은 저의 블로그에 수록한 글이며, 약간의 수정을 거쳤습니다.

https://blog.naver.com/hajin711/22293633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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