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위 Jun 02. 2023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 선택은?

호아킨 피닉스의 '투 러버스(two lovers)'


출처  투 러버스


투 러버스.

영화의 중반부쯤에 들어서서야 알았다. 예전에 이미 보았던 영화라는 것을. 책도 영화도 그렇다. 본 건지 모르고 또 보고 읽은 건지 모르고 또 읽는.... 나만 그런가? 그래서 취향이라는 게 무서운가 보다. 사랑에서도 취향은 지독한 만행을 저지른다. 한 연인을 만나고 헤어지고, 또 다른 연인을 만나고 헤어지지만 지나고 보면 그들 사이엔 오묘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치명적인 매력이든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용납할 수 없는 치부이든 간에 말이다. 물론 어떤 이성이라도 두루두루 잘 사귀는 연애 고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 테지만.


이 영화를 반복적으로 선택한 이유는 아마 호아킨 피닉스 때문일 것이다. 나는 매사에 이미지에 쉽게 이끌리는 사람이다. 그는 결코 멋있지 않다. 외모도 잘생김과 평범함의 중간쯤이라 뭐라 말하기 애매하다. 몸매도 날렵하지 않은 편이어서 얼핏 보면 나이 든 아저씨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신비로운 눈동자이다. 그는 눈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천상 배우이다. 인격형 인공지능 서비스와 사랑에 빠지는 '그녀' 속의 남자와 두 여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팡질팡하는 '투 러버스' 속의 남자는 아주 절묘하게 하나로 겹친다. 특히 둘 다 외롭고 불안하고 찌질한 남자라는 점에서 그렇다. 오직 호아킨 피닉스라서 가능한 대체불가의 남자 주인공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이다.


출처  그녀


투 러버스는 주인공 레너드가 자살 시도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조울증 환자이다. 약혼녀에게 파혼당하고 실의에 빠진 그는 부모님 집에 머물며 세탁소 운영을 돕고 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이미 여러 번의 자살 시도가 있었음을 그의 손목에 남은 상처가 말해 준다. 하지만 그는 완벽히 죽을 만큼 자살에 적극적이진 않다. 강물에 뛰어내린 레너드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물 위로 헤엄쳐 올라와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바보 같다고 욕하는 레너드. 이 남자 왠지 측은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제목인 투 러버스는 두 명의 연인을 말한다. 한 명은 레너드를 사랑해 주는 여자 산드라이고, 한 명은 레너드가 사랑하는 여자 미셸이다. 산드라는 레너드 부모님과 사업 파트너 관계에 있는 집안의 딸이다. 매력적이고 똑똑하고 마음씨까지 착한 그야말로 참 괜찮은 여자이다. 산드라는 다정다감하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레너드에게 처음부터 호감을 가지고 대한다. 아마도 어른이지만 어린아이 같은 면을 지닌 레너드가 산드라의 모성애를 자극한 듯했다. 산드라는 위태로워 보이는 레너드를 따듯하게 보살펴주려 한다.


산드라와 가까워지던 중, 레너드는 이웃집 여자 미셸에게 첫눈에 반해버리고 만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레너드의 마음을 뒤흔드는 미셸은 기네스 펠트로가 연기했는데, 그녀는 정말이지 미셸 그 자체였다. 레너드를 혼미하게 할 만큼 아름답지만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있는 불륜녀이다. 미셸은 레너드만큼이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내면을 지닌 여자이다. 레너드는 두 여자 사이에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랬다 저랬다 한다. 물론 레너드는 미셸에게 본능적으로 더 이끌린다.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반면 산드라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레너드는 미셸에게서 얻을 수 없는 육체적 사랑을 산드라를 통해 대리 충족하기도 한다. 산드라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왠지 레너드에게 이용당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출처  투 러버스


결국 미셸에게 완전히 버림받고 나서야 자신의 열정이 허망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레너드. 그는 미셸에게 주기 위해 준비했던 반지를 아무렇지 않게 산드라에게 끼워준다. 꿩 대신 닭도 아니고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에 길들여져 있는 관객들에겐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결말이다. 하지만 레너드가 미셸에게 버림받고, 자기만 바라보는 산드라의 품에 안기는 결말이 나로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산드라가 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 당장 헤어지고 말겠지만.


뭐가 진짜 사랑인지는 모르겠다. 격정적이고 본능적인 사랑도 사랑이지만, 자연스럽고 따듯한 사랑도 사랑이지 않을까? 레너드에게 미셸은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산드라는 친구 같고 누나 같고 때로는 엄마 같은 편안함의 대상이었다. 레너드와 산드라의 결합으로 끝나는 결말은, 우리가  꿈꾸는 사랑과 현실 속 사랑 사이의 괴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미셸과 레너드에 대한 반감이 아주 컸다. 하지만 다시 보니 이 영화처럼 리얼리즘에 입각한 로맨스 영화가 또 있을까 싶다. 흔히들 말하길 사랑의 상처는 사랑으로 달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물론 환승의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서 혐오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레너드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놓치자 자신을 사랑해 주는 여자에게로 절묘하게 옮겨간다. 둘 다 쫓다가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게 아니라 한 마리 토끼는 잡았으니 나름 영악한 사랑을 한 것이다. 레너드를 기회주의자라 욕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많은 남녀들이 마음속으로 이 정도의 계산은 하면서 사랑하지 않을까? 정말로 양다리를 걸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사랑에 대한 오래된 물음이 하나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할 것이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할 것이냐가 바로 그것이다. 둘 다 장단점은 확실히 있지만 나 같은 경우엔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끌렸던 게 사실이다. 어느 쪽이든 선택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더 사랑했든, 나를 더 사랑했든 절묘한 운명의 타이밍에 딱 맞아떨어진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처럼 운명처럼 말이다. 나는 격정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의 몸짓보다는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따스한 손길에서 더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레너드 역시 사랑을 잃었지만 그보다 더 큰 행복을 얻게 된 건 아닐까?

 

출처  투 러버스

https://tv.kakao.com/v/55888696


매거진의 이전글 장기하가 나보고 상관하지 말고 살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