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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Jun 04. 2023

유부남과의 사랑, 얼굴을 찌푸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어떤 미소'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가는 어떤 것이다.
 
 -로제 바이앙


프랑수아즈 사강과의 두 번째 만남은 '어떤 미소'였다. 왠지 젊은 시절의 사강을 닮은 듯한 여대생 도미니크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어리지만 이미 삶에도 사랑에도 권태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의 남자친구이자 연인인 베르트랑. 둘은 새파란 청춘답게 밝지만 가볍지 않고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은 사랑을 나누는 사이이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베르트랑에게서 충족되지 않는, 알 수 없는 갈망을 느끼며 답답해한다. 젊은 시절엔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특히 20대엔 사랑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지상 최대의 가치로 여기고 우상처럼 숭배하기까지 한다. 어느 날 두 사람 앞에 나타난 중년의 남자 뤽! 그는 베르트랑의 외삼촌으로 조금은 늙고 지친 낯빛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이 늙은 남자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고 이끌리기 시작한다.


도미니크과 베르트랑, 뤽과 뤽의 아내 프랑수아즈 네 사람은 함께 만나면서 친분을 쌓게 된다. 도미니크는 친절하고 배려심 많은 뤽의 아내 프랑수아즈에게 호감과 친밀감을 갖는다. 프랑수아즈 역시 도미니크를 여동생처럼 혹은 딸처럼 여기며 예뻐하고 보살펴 다. 하지만 뤽의 은밀하고도 노골적인 유혹이 시작되자, 도미니크의 마음은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사물의 질서 속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나는 당신을 아주 좋아해.
당신을 아주 좋아한다고.
우리 두 사람이 함께하면 아주 즐거울 거야.
오직 즐겁기만 할 거야.

너는 더 많이 사랑할 거고,
아무 일도 없는 것보다는
더 행복했다가 더 불행해질 거야.

- '어떤 미소' 중 뤽의 말



뤽은 다른 젊은 여자들과 그랬던 것처럼 가벼운 관계를 기대하고 도미니크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하지만 둘은 육체적 교감을 넘어서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둘의 관계는 점점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고 급기야 둘만의 밀월여행을 떠나기에 이른다. 도미니크는 이 여행을 통해 뤽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만다.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연인 베르트랑과는 이별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뤽은 아내인 프랑수아즈에게 고통을 줄 생각이 전혀 없고, 헤어질 마음은 더더욱 없다.  도미니크 역시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상처 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동맹을 맺고 공범을 저지른.
나는 대상이 될 수 없었고,
그 역시 주체가 될 수 없었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도, 그럴 힘도,
그러고 싶은 욕망도 없었다.

- '어떤 미소' 중 도미니크의 말



오직 두 사람의 감정과 본능에만 충실했던 이 주간의 여행이 끝나고, 현실로 되돌아온 도미니크는 가질 수 없는 뤽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한다.  "뤽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절망의 늪에 스스로를 가두어 넣고 서서히 잠식되어 간다. 베르트랑과 프랑수아즈 마저 그 둘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오로지 뤽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집착으로 괴로워할 뿐이다. 뤽은 고통스러워하는 프랑수아즈를 결코 버리지 못한다. 오히려 두 여자의 곁을 잠시 떠나 있음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내가 돌아올 때쯤이면, 넌 나를 잊었을 거야."라는 말을 도미니크에게 남긴 채로.


'나는 나야, 도미니크.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뤽을 사랑해.
나눠 가지지 못하는,
슬프고 불가피한 사랑.
끊어버려.'

-'어떤 미소' 중 도미니크의 말


도미니크는 처참한 몰골로 프랑수아즈를 만난다. 여전히 프랑수아즈는 그런 도미니크를 딸처럼 걱정해 준다. 그녀는 처음부터 도미니크의 젊음을 질투해 왔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뤽 역시 젊고 싱싱한 육체를 탐닉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프랑수아즈에게는 도미니크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거의 없는 듯 보인다. 그녀와의 만남 이후, 도미니크는 뤽과 프랑수아즈가 예전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며 자신의 사랑은 완전히 끝이 났다는 것을 예감한다. 하지만 씁쓸하고도 차가운 체념이 왠지 모르게 그녀의 기분을 한결 좋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느낀다.


출처 아트인사이트


뤽은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도미니크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그를 간절히 기다리기도, 한편으론 기다리지 않기도 하는 나날들이 무심히 흘러간다. 그러던 어느 날 뤽에게서 전화가 온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이제 더 이상 그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고는 놀랐다. 미소 짓는 내가 보였던 것이다. 미소 짓는 나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혼자라는 것. 나는 나 자신에게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혼자, 혼자라고. 그러나 결국 그게 어떻단 말인가?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이다.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였다. 얼굴을 찌푸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 '어떤 미소', 프랑수아즈 사강


소설의 마지막은 '얼굴을 찌푸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라는 도미니크의 독백으로 끝이 난다. 책의 제목인 '어떤 미소'와도 의미가 통하는 부분이다. 그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고 그로 인해 절망했고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마침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얼굴을 찌푸릴 이유가 없다.'라고. 이 소설은 한 편의 연애 성장 소설 혹은 연애 심리 소설 같다. 세상의 모든 유혹에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던 한 젊은 여자가 단단하고 무딘 고목 같은 늙은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정신적, 육체적 사랑의 절정을 경험하고 한층 성숙해 가는 과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그려지는 그녀의 심리는 바다의 표면에 이는 잔물결처럼 부드럽고 유려하게 묘사된다. 나는 그녀가 일으키는 감정의 물결에 몸을 맡긴 채 사랑과 쾌락의 바다 위에서 함께 표류했고, 그녀의 행복과 불행이 뒤섞인 위태로운 파도 속으로 하염없이 빨려 들곤 했다.


도미니크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를 한다. 스스로를 한없이 무가치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에 의해서만 자기 존재가 의미 있다고 느끼는 극단적인 무자아의 상태로 전락한 것이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현명한 여자였다. 아니 대부분의 여자들이 사랑의 실패 이후 현명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끝난 후 미소 지을 수 있게 된 것은 자기 자신과 화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남자를 어떤 방식으로 사랑했든지 간에 결국엔 혼자 남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한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기억은 얼굴에 옅은 주름 하나만을 남기고 사라질 뿐이다. 그녀의 얼굴에 남은 주름과 주름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아름답다. 도미니크가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에 얼굴을 찌푸릴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은 불륜을 소재로 하였기에 모든 사람들이 도미니크에게 공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사강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섬세하고 감수성 짙은 문체와 잘근잘근 씹다만 껌을 그대로 뱉어서 보여주는 것 같은 불쾌하지만 적나라한 내면의 묘사는 소설을 읽는 내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이 정말 좋다. 추접한 이야기 혹은 비극적인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나락으로 추락하는 듯하던 도미니크가 돌연 수면 위로 가볍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발랄한 분위기로의 반전은 마치 사랑의 허와 실을 대놓고 꼭 찔러 보여주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랑,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것 아닌가. 사랑에 있어서는 얼굴을 찌푸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이 끝났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고독했다. 그리고 그 고독의 틈을 비집고 사랑은 잠시 방문하는 우체부의 낯선 편지 같은 것이다. 그가 건네준 편지에 울기도 웃기도 하지만 편지를 덮는 순간 다시 세상은 나 홀로 고독해지니까. 그러니 나는 미소 지어야만 한다. 그 무엇도 아닌 나를 보면서!


출처  El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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