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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Jun 09. 2023

프랑수아즈 사강, 그녀의 소설을 탐닉하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떤 미소, 마음의 심연 그리고 '슬픔이여 안녕'

출처  Elle.co.kr


올해 초여름은 내겐 사강의 시간이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다가 이따금 부는 바람에 땀구멍이 뽀송하게 말라 붙기도 하는, 끈적거리면서도 메마른 계절. 사강은 온몸의 감각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초여름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사강의 소설들은 육체적 감각과 본능을 은밀하게 자극한다. 어릴 적 여자애들과 몰래 돌려 읽던 하이틴 로맨스 소설 속의 노골적인 성애 묘사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강의 소설은 충분히 야하다.


사강과의 첫 만남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였다. 그녀의 문체와 이야기에 빠져든 나는 연이어 '어떤 미소', '마음의 심연', '슬픔이여 안녕'에 이르기까지 네 권을 내리읽었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는 '잃어버린 옆모습'이 놓여 있다. 소설을 읽으며 분명하게 깨달은 것은 사강의 소설에는 계속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그녀만의 매력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네 편 다 생의 지상 최대 과제는 오직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막장이라 할 만한 불륜이나 일상적인 틀에서 빗겨 난 사랑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그러고 보면 처음으로 읽었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가장 무난하고 도덕적으로도 흠결이 없는 작품이었다. 중년의 미혼 여자와 젊은 남자의 사랑은 당사자들만 좋다면 객관적으로 아무 문제도 될 게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이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은 젊은 남자와의 사랑을 버리고 지나치게 현실 타협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젊은 여대생과 유부남과의 사랑을 그린 '어떤 미소', 장모와 사위의 사랑을 그린 '마음의 심연'에서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막장 드라마가 아무렇지 않게 눈앞에 펼쳐진다. 그녀들의 사랑에 공감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이다. 하지만 어떤 플롯과 줄거리의 소설일지라도 사강 특유의 문체는 반복되었다. 나는 이야기보다 그 부분에 더 사로잡혔던 것 같다. 내가 이 소설들을 원어로 읽을 수만 있다면 사강의 문체를 이렇게 수박 겉핥기식으로 접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네 편의 소설 속 여주인공들의 내면 심리에 몰입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녀들과 동일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때로는 불안과 열정에 휩싸여 온몸의 세포가 생생히 타오르는 듯 숨이 막혔. 사랑이란 어쩌면 위험하면 할수록 극도로 매혹적인 것은 아닐까. 도발적이고 위태로운 사랑의 행각을 보면서 나는 잠시 양심이 마비된 채로 사랑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은밀한 동화(同化)는 소설을 직접 읽을 때에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매력인 것이다.


특징적인 점은 네 소설 다 여자의 심리 위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비도덕적인 혹은 비상식적인 사랑 앞에서 남자들이 지니는 태도는 한결같이 당당하거나 뻔뻔하다. 부정한 욕망에 흔들리고 본능에 이끌리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주로 여자들의 몫이었다. 남자들은 죄책감 없이 자신의 육체와 감정에 충실하 모습만을 보인다. 이렇게 단순무식해 보이는 남자들의 유혹 앞에서 사강의 그녀들은 너무나도 쉽게 굴복당하고 만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읽다 보면 사랑이란 것이 한없이 허무하고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한다. 육체에 의한 육체를 위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개인적으로 사강이 18살 때 썼다는 첫 작품 '슬픔이여 안녕'의 결말이 소설 중 가장 충격적이었다. 다른 소설들은 열린 결말로 끝나는데 반해, 이 소설만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끝맺음하기 때문이다. 네 편의 소설을 아우르는 주제가 오직 사랑인 것 같지만 실은 그게 다는 아니라는 생각이 '슬픔이여 안녕'을 읽을 때 좀 더 명확해졌다.


'슬픔이여 안녕' 속의 세실은 자유와 규율 사이에서 갈등하는 어린 소녀이다. 그녀는 죽은 엄마의 친구이자 오랫동안 존경해 오던 안이 자유분방한 바람둥이 아버지 레몽과 결혼하기로 하면서부터 극도로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한다. 안은 우아하고 지적인 여자로 그간 방탕한 삶을 살아온 세실과 세실의 아버지를 안정적인 제도권 내의 삶으로 편입시키려 든다. 하지만 세실은 그녀의 존재를 견딜 수 없어한다. 그녀의 우아한 태도와 친절, 현명한 조언은 세실의 숨을 틀어막는 구속과 압박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그녀는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행복과 유쾌함, 태평함에
어울리게 태어난 내가
그녀로 인해 비난과 가책의 세계로 들어왔다.
자기 성찰에 너무나도 서툰 나는
그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

세실의 연인 시릴, 안으로 인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전 연인 엘자. 세실은 그 두 사람을 이용해 안과 아버지 레몽의 사이를 떨어뜨려 놓으려는 잔인한 계획을 세운다. 시릴과 엘자는 연인인 척 연기하면서 레몽의 눈앞에 수시로 나타난다. 레몽은 그 모략에 너무나도 쉽게 걸려들고 만다. 그는 역시나 세실처럼 자유분방하고 쾌락적이었으며 본능을 억누를 수 없는 부류였던 것이다. 안을 사랑하면서도 젊고 눈부신 엘자의 육체를 또다시 소유하려 한다. 결국 세실이 예견한 대로 안과 레몽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안은 떠나버린다. 세실은 이런 짓을 저지르는 동안 끊임없이 갈등한다. 하지만 그녀의 갈등은 양심과 도덕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 듯했다. 어떻게 하면 죄책감을 덜어낼 것인지를 궁리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유가 더 강했다.


나는 아버지가 가슴속 욕망에 쫓겨 실수를 저지르기를 바랐다. 안이 우리의 지난 삶을 경멸하는 것을, 아버지와 내게는 행복했던 그 삶을 그토록 간단하게 경멸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모욕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인정하게 하고 싶었다.


이런 세실에게 일타를 가한 건 바로 소설의 결말이다. 안은 레몽과 엘자의 부정을 목격하고 성급히 집을 떠나다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세실의 모략은 결국 '죽음'이라는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게 된 것이다. 세실은 죄책감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인다. 그 길은 사고가 잘 나는 길이었고 안의 차는 커브를 잘 돌지 못했었다는 합리화를 하면서....


출처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아르테


안, 안! 나는 어둠 속에서 아주 나직하게
아주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이름을 불러
그것을 맞으며 인사를 건넨다.
슬픔이여 안녕.



하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슬픔이여 안녕'이란 말은 슬픔에 대한 작별인사가 아니다. 죽을 때까지 반복될 만남의 인사인 것이다. 안의 죽음으로 영원히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슬픔'은 어느 날 어느 순간이고 느닷없이 찾아와 세실을 장악해 버리는 것이 되었으며, 그럴 때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슬픔을 맞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깊은 체념이 담겨있는 인사인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 맨 처음 소설의 시작 부분을 다시 읽으면 이제야 '슬픔'의 의미가 무엇인지 예리하게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간다.

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이 감정이 어찌나 압도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내가 줄곧 슬픔을 괜찮은 것으로 여겨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슬픔, 그것은 전에 모르던 감정이다. 권태와 후회, 그보다 더 드물게 가책을 경험한 적은 있다. 하지만 오늘 무엇인가가 비단 망처럼 보드랍고 미묘하게 나를 덮어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킨다.


자유와 타락의 결말은 '슬픔'이 아닐까. 그녀는 스스로 말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 아닌 자를 파괴하는 데서 오는 지독하고 영원한 슬픔. 나는 그녀의 자유와 쾌락 이면에 도사린 죄의식과 슬픔을 발견하고 나서야 네 편의 소설 모두를 한꺼번에 끌어안을 수 있었다.


그녀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고 그런 자극적인 불륜 소설로만 읽힐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인간의 원초적인 육체와 감정, 그것에 대한 탐구와 탐닉으로 보인다. 오직 실존만이 중요한 문제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만 같다. 쾌락도 슬픔도 내 안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벗어날 수 없는 나의 일부일 뿐 아닌가. 누구라도 나를 파괴할 권리는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을 위해서든 또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든. 그러고 보면 사랑을 위한 자기파괴만이 인간의 가장 순수한 모습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나는 나의 육체와 본능, 열정을 불사를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사라져 버릴 정신,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위해 지금의 나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사강이 그 날카로운 눈으로 끊임없이 내게 묻고 있는 것만 같다.


출처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아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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