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경력단절의 세월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고 14년 경력단절녀인 나는 오랜만에 첫 출근에 나섰다. 오랜 시간 경단녀로 지낸 터라 긴장과 적응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어떤 사람들과 일을 할까? 오래 일을 쉬었는데 잘 따라갈 수 있을까?’ 긴장된 발걸음과 달리 마음 한편은 설레고 두근거렸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 부동산 감정과 재산세를 매기는 회사로,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Municipal_Property_Assessment_Corporation
정말 내가 알던 세상은 이제 없었다. ‘와’ 하고 얼어버렸다. 회사 내 모든 것이 최첨단 시스템으로 바뀌어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배울 생각에 설레기도 했지만, 많은 부담이 있었다. 자리를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다 다른 직원의 도움으로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알고 보니 임원을 제외한 모든 직원이 정해진 자리 없이 매일 자기 자리를 예약 후 사용하는 시스템이었다.
‘스르륵’
‘어머 저건 뭐지?’ 책상 역시 자동이라 키에 맞게 조절할 수 있었다. 너무 놀라웠다. 책상에는 익숙한 종이도, 전화기도 없었다. 모든 것을 디지털 기기가 대신했다. 당시는 팬데믹도 아니었지만 늘 화상회의를 했다. 모든 것이 체계화되어 배울 것이 많았다. 온타리오주 전역에 있는 지사끼리 서로 업무를 연계시켜 일하는 시스템이었다. 회사 출근이 오랜만이라 첫날부터 업무를 따라가기 버거웠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얘기하면서 일을 파악하고자 했다. 어렵게 온 기회인 만큼 매사 진지하게 배웠고 하루하루 열심히 했다. 다행히 곧 일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MPAC에는 홍콩,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았다. 홍콩 사람들은 같은 아시아인이라 다가가기 편했고 서로 챙겨주는 분위기였다. 덕분에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과 비슷한 점이 많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情’이 있다. 파티를 초대받으면 확연히 느낀다. 음식을 많이 준비해 많이 먹으라고 계속 챙겨준다.
‘14년 만에 다시 찾은 나의 커리어!’ 마냥 행복할 줄 알았지만 한 가지가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회사의 많은 직원이 계약직으로 시작한다는 것. 나 역시 6개월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매일 회사 내부 시스템에 채용 공고가 올라온다. 재계약 시점이 다가오는 회사 직원들은 다시 지원을 해야 한다. 다시 경쟁해서 재취업하는 시스템이다. 어떤 직원은 1개월 혹은 3개월에 한 번씩 재계약한다. 가끔 정규직 자리가 올라오면 그야말로 경쟁이 치열하다.
캐나다에서 계약직은 흔하다. 계약직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능력을 인정받아 쉽게 이직과 연봉 인상을 할 수 있어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나는 계약직으로 일하는 것이 처음이라 언제 해고될까 불안한 마음으로 회사에 다녔다. 결국 매니저인 사브리나(Sabrina Vizzacchero)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사브리나, 다음 계약이 이뤄지지 않을까 봐 너무 불안해요. 다음 계약을 미리 연장해 줄 수 있을까요?” 다행히 사브리나는 그렇게 배려해 주었다.
계약직 시스템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드디어 일하던 포지션의 토론토 지사 정규직 공고가 올라왔다. 당시 일하던 사무실은 집과 가까운 리치먼드 힐(Richmond Hill) 사무실이었지만 정규직이라는 것에 끌려 주저 없이 지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눈독 들이고 있었다. 20년 경력을 가진 동료 역시 그 자리에 지원했다. ‘저 친구는 심지어 오빠가 토론토 지사의 지사장이잖아..! 난 안 되겠구나’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내게도 인터뷰 기회가 온 것이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떨어지고 동료가 합격했다.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합격한 친구에게 다가가 축하해 줬다. 그 친구는 메어리안(Maryann). 캐나다에서 태어난 이탈리안 캐네디언이다. 동갑에 서로 성격이 맞아 지금도 가끔 안부를 물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쉽게 정규직 자리는 떨어졌지만, 인터뷰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비록 계약직이지만 회사에 다니지 않았다면 정규직 인터뷰까지 닿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한번 시도하여 성공하면 정말 좋겠지만 인생에서 그런 행운을 바라면 되겠나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떨어졌다고 낙담하지 말자. 비 온 뒤 땅이 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