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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에서 만난 따뜻한 가이드

Old Fort Erie

by Elizabeth Kim

오대호를 따라 달리다 보면, 문득 과거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


Old Fort Erie!


캐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요새 중 하나이자, 1812년 전쟁의 격렬했던 현장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성문을 지나자마자 터져 나온 건 “팡!” 하고 울린 총성.

머스켓 사격 시범이었다. 포연이 하얗게 흩어지며, 단숨에 200년 전 전쟁터로 순간이동한 듯한 기분이었다. 병사들이 실제로 이 총을 들고 싸웠다고 생각하니, 총성 하나에도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시범이 끝나자 우리는 요새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사들의 생활공간, 탄약고, 무기와 장비들이 차례로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이곳의 특별함은 사람의 목소리로 전해주는 방식에 있었다.


내 가이드는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그녀는 ‘봉사’로 이 일을 하고 있었다. 돈을 받는 일이 아니라,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내어 방문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교과서보다 진지했고, 목소리는 다큐멘터리보다 생생했다. 설명을 듣는 동안 문득 TV 속 역사 강사가 떠올랐다. 그만큼 몰입감이 있었다.




방을 옮길 때마다 그녀는 작은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았다.

“이 창문은 그냥 창문이 아니라 방어용 총 안구였어요.”

“당시 병사들의 식단은 생각보다 훨씬 단출했죠.”


그러다 발걸음을 멈춘 그녀는 요새의 긴 역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곳은 단 한 번 지어진 요새가 아닙니다. 무려 네 번이나 다시 세워졌죠. 처음은 1764년, 강가에 지어진 요새였지만 봄마다 불어난 강물과 두꺼운 얼음에 무너졌습니다. 두 번째 요새도 같은 운명이었고요. 지금 보시는 건 세 번째 요새를 기반으로 1805~1808년에 지어진 것입니다.”


“1814년 1월, 요새는 다시 수리되었지만 불과 몇 달 뒤인 7월 미국군에게 함락됐습니다. 그들은 이곳을 작전 기지로 삼았고, 런디스 레인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곳으로 퇴각했죠. 영국군은 8월과 9월 내내 포위했지만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결국 11월 5일, 미국군은 요새를 스스로 폭파하고 철수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지며 무게를 더했다.

“이후 오랫동안 이곳은 폐허로 남았지만, 캐나다가 나라로 서는 과정에 중요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지금 우리가 걷는 이 자리가, 나라의 운명이 뒤바뀐 현장이었던 셈이죠. 그리고 1930년대, 나이아가라 파크 커미션이 요새를 1814년 당시 모습으로 복원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순간 유적지를 걷는 학생이 된 듯했다. 역사책의 건조한 연도가, 그녀의 목소리 속에서 생생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설명이 끝나고 도착한 곳은 작은 부엌이었다. 당시 복장을 한 직원이 직접 빵을 굽고 있었다. 따끈한 빵과 구수한 쿠키가 나눠졌는데,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실제로 먹었던 음식을 재현한 것이었다. 입안에 퍼지는 고소한 맛과 함께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역사를 이렇게 맛볼 수도 있구나.” 그 어떤 전시품보다도 강렬했던 순간이었다. 전쟁 속에서도 누군가는 빵을 굽고, 식탁을 지키며, 삶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이 경험을 특별하게 만든 건 결국 사람이었다. 역사는 책 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열정과 목소리를 통해 이어질 때 비로소 살아난다. 그날의 Old Fort Erie는 내게 사람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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