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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zabeth Kim Dec 26. 2023

엄마인 내게 세 엄마가 생겼다

세 분의 캐네디언 맘

난 육아를 오래 했다. 2001년 둘째를 출산하고 육아 휴직을 낸 후  돌아가지 당시 다니던 Ainsworth Inc.로 돌아가지  않았다. 약 14년을 전업 육아를 하며 또 약 10년간 홈 비즈니스를 겸업으로 운영했다. 말이 육아지 이때만큼 열심히 살았고 또 살 시간이 또 있으랴...




2003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뉴 마켓(New Market)이라는 작은 도시로 타운 홈을 사서 이사했다. 한참 육아를 하며 집에 있을 때 마당 앞 정원 잡초를 뽑거나 오가며 이웃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친해졌다. 2005년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정원 잡초를 뽑고 있었다. 앞집에 살던 고등학교 과학 선생님인 미셸(Michelle)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집에만 있으니 영어를 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걱정이다.” 내 푸념을 듣고 미셸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질(Jill) 할머니 댁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 7~9시에 뜨개질 수다 모임이 있으니 참여하고 싶으면 올래?”




수년간 아이들을 두고 혼자 나간 적이 없었기에 정말 오랜만에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사교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뜨개질 수다 모임에서 만난 세 분의 할머니들(메리, 린, 질 Mary, Lynn, Jill)과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만났다.  


메리 할머니는 이탈리아 분으로 남편이 광산 기업의 엔지니어 CEO로 풍요로운 부자였다. 함께 플로리다에 있는 별장에 놀러 가기도 했다. 린 할머니는 따듯한 인상의 책을 좋아하며 글을 잘 쓰는 할머니였다. 그 당시 벨 캐나다(Bell Canada, 우리나라의 KT와 같은 통신사)에 근무하다 은퇴하신 분으로 유머러스하고 항상 모임에서 웃음을 주는 역할이었다. 질 할머니는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며 동물을 사랑하는 분이었다(위험한 개 장난감을 고발하는 프로에 출연도 하셨다). 모임의 호스트 역할로 매번 차와 쿠키를 준비해 주었다.  


우린 매주 질 할머니 댁에서 모여 일주일간 있었던 얘기를 나누며 친해졌고 점점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나게 되었다. 함께 영화, 뮤지컬 같은 공연도 관람하고 피크닉도 갔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다양한 레스토랑도 다녔다. 육아에 지쳤던 내게 이 시간은 단비와 같았다. 급기야 함께 라스베이거스(Las Vegas)와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에도 갔다.




엄마로서 부모의 자세를 세 분에게서 배웠다. 중요한 것은 경청이란 사실을. 세 분은 타지에서 피도 섞이지 않은 나를 자신들의 딸처럼 여겨줬다. 진심으로 이야기를 듣고 존중과 지지를 보내주었다. 말로 표현을 다 할 수 없지만 언제든 나를 받아 줄 거라는 믿음과 신뢰가 있다. 엄마인 내게도 엄마는 필요했다. 먼 고국에 계신 엄마에게 직접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에 더욱 간절했다.


사람들은 캐나다가 철저한 개인주의로 부모와 자식의 삶이 분리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관여와 간섭을 하지 않을 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나름의 세심한 배려였다. 할머니들의 얘기를 통해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여유롭고 따듯한 가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먼 타지에서 살아남아야 해!’라는 척박한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생존하기 위한 삶을 벗어나 따듯한 삶을 살아야지 마음먹게 되었다.


우리들은 가족 같은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세분과 나 이렇게 네 명은 지금까지 인연이 되어 18년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세 분은 매년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에 손 편지를 집으로 보내준다. 이분들이 나에게 베푼 캐나다 경험과 삶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세 분의 도움으로 난 캐나다 문화, 가족의 의미, 예절, 세심한 배려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가끔 내 얘기를 듣고 주변 한국 사람이 그 모임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임이 지루하다며 한두 번 정도 나오다 말았다. 나 역시 육아를 하면서 모임을 꾸준히 나가기란 쉽지 않았지만, 꾸준히 나갔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유창한 영어를 하진 못해도 생존 영어를 구사하며 함께 소통하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통하면서 모임이 즐거워졌다. ‘정말 간절했다면 그렇게 쉽게 포기했을까?’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말로는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시작하면 꾸준히 하지 않는다. 작은 난관들을 크게 여기고 쉽게 포기해 버리면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결국 더 이상 외부인을 초대하지 말고 우리 넷이서만 모임을 진행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우리 넷은 더 끈끈해지고 유대감이 깊어졌다. 세 분과의 시간을 통해 우울증과 혼돈의 시간 속에서 마음이 안정적으로 바뀌고 원하는 길을 찾아 나설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다. 부모의 역할이 바로 그 지점이라 생각한다. 세 분은 나에게 엄마와 같은 존재이자 캐나다에서 나를 바로 세운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어느 날, 진지한 고마움의 표현을 하고 싶었다. 긴 장문의 편지로 고맙다는 말을 대신하는 내게 세 분은 말했다.


“우린 네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잘해 주었다. 낯선 캐나다 땅에 와서 진심으로 캐나다를 배우려는 자세와 노력이 우리에게 와 닿았다.”




젊을 땐 남들이 보기 좋은 직장, 학력, 돈을 가진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대단한 사건이 주는 행복만큼이나 소소히 쌓는 경험도 소중하단 걸 깨달았다. 행복은 추구하고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녹아있음을. 이때의 깨달음은 오랫동안 은은히 곁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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