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스럽지만 다정한.
동네 수영장에 등록했다. 수강인원 제한이 있는 데다 기존 회원 재등록이 우선이라 신규 회원이 되기는 하늘에 별따기였다. 그런데 이번 달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 없이 수영장에 혼자 가는 게 뻘쭘했다.
남자 탈의실 사정은 모르지만, 여자 탈의실은 그야말로 '여인천하'랄까. 비슷한 연령대, 비슷한 체형의 아줌마들이지만 그들끼리는 나름의 견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뉴페이스의 등장에 흘긋거리는가 하면, 이미 다니고 있던 아줌마 회원들끼리는 그룹 지어서 대화하기 바쁘다. 수영 수업이 끝나고 무엇을 할지 계획을 짜는 무리도 있다. 보통은 밥을 먹거나 카페에 가는 것 같다. 심플하게 방향이 같아서 집에 같이 가는 이들도 있다.
뭐,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었다. 아줌마들이랑 함께 수다 떨 것도 아니고, 수영만 하면 되니까.
그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목소리가 크고 '언니, 언니' 하면서 살갑게 대하는 파워인싸 아줌마다.
"어머~ 언니 살 빠진 거 봐" "언니들, 우리 한동안 못 모였는데 이번 기회에 밥도 먹고 근황 토크하는 건 어때?" 그 아줌마를 중심으로 작은 모임이 형성된다. 동네 수영장에서 형성된 아줌마 사회라니 어딘가 귀엽다.
나는 관찰자다. 아줌마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영장에 들어서면 가장 첫번째 라인은 '걷기 라인'이다. 그 라인은 관절이 약해 물속 걷기 운동을 추천받은 아줌마나 어르신들이 주로 이용하는데 걷기 외에도 제자리에서 자신만의 에어로빅을 하거나 물속 스트레칭을 하는 아줌마도 있다. 아줌마들은 서로 속도를 맞춰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눈다.
일부러 들으려 하지 않아도 아줌마들의 목소리는 귀에 쏙쏙 들어온다. 주로 아들, 며느리, 손주 등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일면식도 없는 남의 집 사람들 이야기이지만, 아줌마들은 서로 정성껏 들어주고 공감대를 형성한다.
예전에 한 트로트 가수가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수영 실력을 쌓고자 수영장에 오는 아줌마들은 몇 명 되지 않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중세시대 유럽 국가에서 사교파티 문화가 있었듯, 대한민국에는 수영장이 바로 사교의 장이 아닐까.
강습이든, 자유수영이든 매시간 정각에는 모두가 5분 동안 준비운동을 하고, 50분이 되면 물밖으로 나와야 한다. 50분 수영, 10분 쉬는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수영장이다.
수영을 하면서 시간을 계속 확인하지 않아도 50분이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걷기라인의 아줌마들이 이탈하기 시작하면 때가 됐다는 것.
검은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아줌마들이 천천히 물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동물의 왕국'이 떠올랐다. 물에 젖어 빤뜰거리는 수영복과 매끈하게 드러난 아치형의 몸매, 느릿한 걸음은 바다사자나 물범이 뭍으로 올라오는 모습같아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기존 회원들간의 끈끈함 때문에 텃세를 느낀다고도 하지만, 귀엽고 수다스러운 바다사자들은 다정하다.
한 번은 목욕바구니에 챙겨 넣은 줄 알았던 샴푸와 바디워시가 온데간데없었던 적이 있다. (물론 내 부주의로 인해 집에 놓고 온 것이었지만.) 얼마나 당황했던지 샴푸와 비누칠도 하지 못하고 그냥 물로만 씻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을 때 맞은편에서 씻고 있던 아줌마 한 분이 웃으면서 자신의 목욕바구니를 건넸다. 아가씨 알아서 꺼내 쓰라는 말과 함께. 옆에 있던 아줌마도 "아가씨 씻는 거 없어? 샴푸는 이거 써~ 이거 양 많다"하면서 자신의 용품을 꺼내 보였다.
머쓱한 미소와 함께 나는 그 목욕바구니를 넙죽 받아 들었고, 걱정 없이 수영장 물을 씻어낼 수 있었다.
이런 게 K-아줌마들의 情인 거겠지. 그 뒤로 목욕바구니에 샴푸와 바디워시를 빼놓고 다니는 일이 없어 모르겠지만, 아마도 수영장 샤워실에서 일전의 나처럼 당황하는 사람이 있다면 샤워실 안의 누구라도 선뜻 자신의 용품을 건넬 것이다. 물론,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