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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진경 Mar 28. 2023

엄마, 나 계속 눈물이 나.

이게 다 약 때문이야!

밤 9시가 넘어도 잘 생각이 없는 소은이. 침대에서 정신없이 뛰는 소은이에게 "소은아, 이제 자야 하니 그만 뛰어."라고 타일렀지만 소은이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시 노래를 흥얼거리며 뛰는 소은이를 보자, 그 순간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M: 소은아, 엄마가 뛰지 말라고 했지!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눈물을 터트렸다. 서럽게 우는 아이를 보고, 나는 다시 이성이 돌아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얼른 아이에게 다가가 아이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M: 소은아, 많이 놀랐지? 엄마가 소리 질러서 미안해. 엄마가 순간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엄마 진심이 아니야. 엄마가 소은이 많이 사랑해."


그러자 소은이는 바로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아."하고 흐느끼며 말했다. 여섯 살이 된 후 소은이는 예전보다 울음이 짧아졌고, 막무가내로 우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특히 울다가도 상대방이 사과를 하면 화났던 마음이 누그러져서 사과를 받아주고 다시 싱긋 웃곤 했다.


오늘도 그렇게 아이의 마음이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아이가 받은 상처가 컸나 보다. 어느 때처럼 자려고 누워서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엄마, 나 자꾸 눈물이 나."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측은해서 다시 한번 소은이를 안아주고, 소은이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M: 소은아, 왜 눈물이 나?

S: 나 아까 엄마가 소리 지른 게 너무 속상했어.

M: 소은이가 아까 엄마가 소리 질러서 많이 속상했구나. 아깐 엄마가 정말 미안했어.

S: 응, 괜찮아.

M: 이제 다시 책 읽을까?

S: 응!


그러고 다시 책을 읽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은이가 눈을 비빈다.


S: 엄마, 나 계속 눈물이 나.


나는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이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눈물을 꾹 참으며 소은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M: 소은아, 엄마가 약 때문에 감정 조절이 잘 안돼. 그래서 가끔 소은이가 엄마 말을 안 들으면 너무 화가 날 때가 있어. 그건 엄마가 소은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엄마가 쭈쭈가 아팠던 것 때문에 약을 먹고 있는데 약 때문에 그래.

S: 엄마, 쭈쭈도 안 아프고, 약도 안 먹었으면 좋겠어.

M: 하지만 엄마가 소은이 곁에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있으려면 약을 먹어야 하고, 이렇게 화를 내는 일도 없어야 해. 소은이가 엄마 화내지 않게 엄마 좀 도와줄래?


나는 내가 먹고 있는 타목시펜(유방암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 사용하는 약물로 호르몬을 조절함)을 명분 삼아 아이에게 화를 낸 것이 엄마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려 애썼다. 정말 타목시펜 때문인 건지, 아니면 내 인내심이 바닥을 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실제로 타목시펜의 부작용으로 감정기복 등이 거론되곤 한다. 사실 타목시펜의 부작용은 매우 광범위해서 화를 잘 내는 것, 기분이 우울한 것, 건망증이 심해진 것, 뱃살이 찌는 것 등등...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이 타목시펜 때문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실제로 타목시펜을 먹는 유방암 환우들은 문제가 생기면 농담처럼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게 타목시펜 때문이야!'


흔히 인간은 호르몬의 노예라는 말이 있다. 호르몬은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조절하고 있는 물질이다. 생화학자들은 인간의 의욕, 성욕, 사랑까지도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주장하니 실로 호르몬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표현도 어색하지 않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뇌로 생각하고, 행동을 한다고 여기지만 결국 인간은 호르몬에 의해 살아간다고 한다. 따라서 체내 호르몬 균형이 약간만 깨져도 총체적인 영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약물로 호르몬을 억지로 조절하고 있으니 당연히 문제가 따를 수밖에.


인간은 갱년기가 되면 노화에 따라 생식 기능이 저하되고 성호르몬의 분비가 급감하여 신체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그런데 나는 항호르몬치료로 30대에 갱년기를 맞이했고, 흔히 우리 어머니 세대가 겪은 갱년기 증상이 약을 먹기 시작하며 한꺼번에 몰아쳤었다. 안면 홍조, 체온의 급격한 변화, 피로감, 불안감, 우울함, 기억력 감퇴, 수면 장애 등.


암을 진단받고 치료한 지 2년 차가 되어가면서, 내 몸도 약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여 다른 증세는 거의 완화되었지만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것과 기억력 감퇴, 이 두 가지는 당최 적응이 되지 않고 빈번히 계속된다. 그래서 누가 보면 때론 이상하다고 생각할 만큼, 아이에게 버럭 화를 냈다가 바로 미안해하기를 반복하고 건망증 환자처럼 많은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결국 타목시펜의 가장 큰 피해자는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인 소은이와 남편이 되었다. 육아가 예전보다 수월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내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것이 육아이며, 한층 더 심해진 건망증으로 남편이 나 대신 챙겨야 할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최소 3년, 길게는 8년 동안 이 약을 더 복용해야 한다. 그때쯤이면 아이는 9살, 혹은 14살이 되어있을 것이다.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또는 중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나의 치료가 계속되는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사춘기가 되어도 아이가 나를 이해해 줄까? 소은이가 사춘기가 되기 전에 나의 갱년기가 끝나야 할 텐데. 약을 끊고 호르몬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면 나에게도 제2의 갱년기가 올는지 궁금하다. 아니면 이대로 영영 에스트로겐은 굿바이일까.  


생리가 다시 돌아오든, 이대로 폐경이 되든, 그런 건 어찌 되든 상관없다. 그저 재발과 전이 없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가족들 곁에 있고 싶은 마음뿐.


소은아, 엄마가 아깐 정말 미안했어.

이게 다 약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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