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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만난 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에요.

4월. 다시 만난 제자, 다시 살아난 꿈

by 강진경

학교에서 가장 정신없는 달은 3월. 새 학기는 학생도 적응을 해야 하지만, 교사도 새로운 학생, 새로운 업무에 적응을 하는 시기이다. 나는 오랜 휴직을 마치고, 학교에 복귀하여 그야말로 정신없는 한 달을 보냈다. 이제 막 적응을 마치고, 학교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교무실에 H가 나타났다. 2017년에 중학교 1학년이었던 H는 어느새 22살,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H가 중학교 1학년 일 때 나는 어렵사리 임신을 하고 휴직에 들어갔고, 그녀가 졸업할 때까지 육아휴직을 했기에 정작 그녀를 가르친 건 중학교 1학년 1학기, 고작 6개월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학교를 떠난 뒤에도 간간히 나에게 카톡을 보내왔고, 선생님 언제 오실 거냐고, 기다리고 있다며 졸업을 할 때까지 3년 동안 이따금씩 내게 연락을 해왔었다.


그 후 나는 육아휴직을 마치고, 학교로 복직을 했지만 복직을 하고 2개월도 되지 않아 유방암을 진단받게 되었고, 수술을 마치고 나서 다시 질병휴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학교를 떠나 있으면서 연락이 점점 끊어진 제자들이 있었고 H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 그녀가 교무실에 나타났을 때 나는 왠지 모를 반가움에 눈물이 울컥 났다. 유난히 나를 많이 따랐던 H.


중학교 1학년 꼬맹이가 어느새 어엿한 어른이 되어 내 앞에 있을 때 그 감동이란... 8년 만에 만났지만 H를 보자, 마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듯, 8년 전 그 시절이 눈앞에 펼쳐지며,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 시절 한없이 작고, 귀여웠던 아이는 고맙게도 멋진 어른이 되어, 나와 같은 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 덕분에 국어라는 한 과목을 좋아하게 됐고, 그로 인해서 한국어를 더 사랑하게 됐어요. 그 때문인지 말을 하는 것도 한 마디 한 마디 조심스럽게, 소중하게 내뱉게 되더라고요. 제가 중학생 때 선생님을 만난 건 나중에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나로 인해 국어를 좋아하게 됐고, 한국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아이의 고백에, 중학생 때 나를 만난 게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축복이라는 아이의 예쁜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생각해 보면 이 아이는 8년 전에도 내게 감동을 주었더랬다. 선생님 대체 언제 학교로 돌아올 거냐고, 보고 싶다고, 늘 나의 안부를 먼저 물어주던 H.


다음날 H에게서 또 카톡이 왔다.


선생님, 어제 뵈었는데도 또 뵙고 싶고 그래요⋯⋯. 아무래도 제가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이…

나는 H의 말에 웃음이 피식 났다. 귀여운 녀석. 초임 시절, 나는 내가 학생들을 짝사랑한다고 생각했었다. 교사의 꿈을 이루고 처음 만난 학생들은 내게 사랑 그 자체였고, 나는 국어교사로, 또 담임교사로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하지만 교사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짝사랑이라 생각했다. 부모가 아이들을 짝사랑하는 것처럼, 교사의 사랑도 결국엔 내리사랑이니.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처럼 교사의 사랑도 대부분 짝사랑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사제지간을 맺은 지 8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를 짝사랑한다는 H의 고백에 나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내가 아이들을 사랑한 것처럼, 아이들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사랑하고 있었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H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고, 내가 그녀의 인생에 내가 생각한 것보다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뭉클하기도 했다.


한 달 뒤, 스승의 날에 H에게서 또 연락이 왔다.

스승의 날은 '축하합니다.'가 아니라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선생님,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제자로, 또 한 사람으로 정말 존경하고 있습니다. 사랑해요, 선생님!

교무실에서 H의 메시지를 읽고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서 빨리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 제자들이 종종 찾아오지만 유독 H를 봤을 때 눈물이 났을까 그 이유를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누군가의 인생에 의미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게, 얼마나 가슴 벅차고 보람 있는 일인지 H가 내게 다시 일깨워준 것이다. 그동안 인생에 힘든 일도 있었고, 앞으로 나의 장래에 대한 고민도 많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교사가 되길 잘했구나. 이곳에 와서 아이들을 만나길 참 잘했구나.'라는 것. 누군가의 삶에 이렇게 오랫동안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직업이 얼마나 될까.


정확히 1년이 지나고, 올해 또다시 스승의 날이 찾아왔을 때, H는 잊지 않고, 내게 안부를 물어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H예요. 얼마 전부터 선생님 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 연락을 드려야지 했는데, 마침 오늘이 스승의 날이잖아요! 사실 제가 중학생 과외를 올해 초부터 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가 선생님 너무 보고 싶더라고요. 아마도 지금까지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주신 건 선생님이신 것 같아요...(중략)... 항상 아이들의 곁에서 버팀목과 숲, 그리고 세상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고, 부족한 저에게 베풀어 주셨던 모든 것들을 평생 기억하면서 살게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라요.

나는 H가 보내온 메시지를 다시 꺼내 읽으며 조용히 내 삶의 이유를 찾았다. 어디에 있든, 나는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싶고, 누군가의 삶이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뀐다면, 내 인생은 헛된 게 아니었다. H의 메시지는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고, 나는 그녀 덕분에 많은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다시 또 다른 아이들을 사랑하려 한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아이들 곁에서 버팀목과 숲, 그리고 세상이 되어주어야지.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이 짝사랑이어도, 또 아니어도 상관없다.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나와의 만남이 그 아이의 인생을 축복으로 바꾼다면, 이보다 더 멋진 일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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