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린 아침
"엄마, 오늘 아침에 비가 왔어."
창문을 내다보고 있던 소은이가 내게 말을 건다.
"그래? 밖에 비가 왔어?"
나는 빨래를 개며 소은이의 말에 대답했다.
"응! 내가 오늘 비 온 걸 어떻게 알았게?"
"글쎄. 어떻게 알았어?"
"건물들이 슬퍼 보여서."
"건물들이 슬퍼 보여?"
"응, 슬퍼 보이지."
"왜 그렇게 생각해?"
"왜냐하면... "
소은이는 잠깐 창밖을 다시 바라보았다.
“비가 오면 건물들이 다 울고 있는 것 같거든.”
나는 빨래를 개던 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건물들이 울고 있다고?"
“응, 건물들이 다 젖어있잖아. 그게 눈물 같아.”
나는 아이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비가 오면 건물들도 슬픈가? 건물이 어떻게 슬프지?
어른인 내게 비 오는 날은 그저 날씨가 궂은날에 불과하다.
아침에 우산을 챙겨야 하는 날, 빨래가 마르지 않는 날, 출근길이 조금 번거로운 날.
그런데 아이의 눈에 비 내린 아침은 조금 다르다.
건물들이 슬퍼 보이는 날.
어쩌면 아이는 나보다 더 깊은 눈으로 세상을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창밖을 보지만 소은이는 그 안에서 사물의 마음을 본다.
심리학에서는 아이들이 사물에도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를 ‘물활론적 사고’라고 부른다. 즉 생명이 없는 대상에도 생명·의도·감정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해가 나를 따라와.”
“인형이 슬퍼할 것 같아.”
“돌이 아파서 울고 있어.”
라고 말하는 것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미숙한 사고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아이들은 세상을 대상이 아닌 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어른들이 사물의 기능과 의미를 먼저 떠올린다면, 아이들은 그 안의 감정과 이야기를 먼저 발견한다.
발달 심리학자인 피아제는 전조작기(약 2~7세) 아동에게서 물활론적 사고가 많이 나타난다고 보았고, 이것을 아동의 미성숙한 사고라기보다 세계와 관계 맺는 자연스러운 인지 방식으로 보았다. 이런 사고는 대체로 일곱 살 무렵까지 두드러지다가, 초등학교 시기에 접어들며 점차 논리적 사고로 바뀐다.
하지만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건, 단순히 물활론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세상을 향한 감수성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소은이도 알 거다. 건물에겐 생명이 없다는 것을. 단지 아이의 눈엔 비가 내린 뒤 젖어있는 건물들의 모습이,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뿐. 어른들은 비를 단순한 기상 현상으로 이해하지만, 아이들은 “하늘이 울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쩌면 아이들은 세상을 어른보다 더 많이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잊어버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 그래서 어린이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른의 그것보다 더 다채롭고, 조금 더 풍부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은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지금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물의 마음을 상상하고, 평범한 풍경 속에서도 이야기를 발견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마치 시인과 같은 마음으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사랑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