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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진경 Jan 18. 2022

다섯 살 아이와 서른 아홉 살 엄마

나이 든다는 것

M: 소은아 축하해~ 이제 소은이 다섯 살 언니야!


새해 첫날. 아이가 눈을 뜨자마자 나는 반갑게 새해 인사를 전했다.


S: 정말? 나 이제 다섯 살이야? 우와 신난다!!


아이는 언니가 되는 것이 그렇게 좋은지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며 기뻐했다. 나이 먹는 것이 그리도 좋을까. 한참 언니 오빠를 따르고 좋아하는 나이라 그런지 본인이 한 살 더 먹은 언니가 된다는 사실이 기쁜 모양이다.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유치원에 간다는 사실도 아이를 설레게 만들었다. 소은이는 벌써부터 유치원에 입학한다는 사실을 뿌듯해했고, 유치원을 지날 때마다 "나 이제 언니 되어서 유치원 가지, 엄마?"하고 자랑스레 묻곤 했다.


M: 소은아, 언니 되는 게 그렇게 좋아?

S: 응, 좋아! 나 언니 되면 유치원도 가고, 놀이동산 가서 놀이기구도 탈 수 있잖아.

M: 그렇구나. 소은이는 좋겠다. 어른들은 나이 먹는 걸 싫어하는데.


 나는 소은이를 바라보며 문득 소은이의 인생과 나의 인생의 그래프가 반대 방향으로 맞물려있다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소은이의 인생 그래프는 점점 위로 향하는 곡선인데, 나의 인생 그래프는 점점 아래로 향하고 있고 우리 둘이 만나는 점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소은이는 어떤 인생을 살아갈까?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문득 소은이의 반짝이는 미래가 부러웠다.

 

 우리는 어른 되면 어느 순간부터 나이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 그 지점이 언제부터일까? 스무 살? 서른 살? 내 기억을 돌이켜보면 이십 대 중반만 되어도 나이 먹는 것이 아쉬워졌던 것 같다. 성인이 되어 나이 든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깨닫고 나면 나이 먹는 것이 더 이상 반갑지 않다. 아무것도 해둔 것이 없는데 나이 드는 것이 두려워진다.  결국 아이들은 빨리 언니 오빠가 되고 싶고, 대들은 어른이 되고 싶은데, 정작 어른이 되고 나면 나이 먹는 게 싫어지니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소은이가 나이 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나이가 들수록 할 수 있는 게 더 많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게다. 청소년기를 보내는 대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빨리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스무 살이 되고, 성인이 되면, 자유가 생기고 자신의 마음대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어른이 되면 지긋지긋한 공부에서 벗어나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녹록지 않은 현실을 마주한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흔을 앞둔 지금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모든 걸 내려두고 내 마음대로 산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나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든다.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노력하고, 이십 대의 많은 날들을 교사가 되는 데 쏟아부었다. 교사가 되어서는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늘 노력했고, 결혼을 하고는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려고 애썼다. 항상 무언가를 위해 애쓰며 치열하게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암을 진단받고 나니,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온 삶이 조금은 후회가 된다. 반짝이는 젊은 시절, 좀 더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볼 걸. 어디론가 훌쩍 떠나도 볼 걸.  많은 걸 경험하고 더 넓은 세상을 밟아볼 걸.


 이런 생각에 미치자 소은이는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유연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꿈꾸고,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너무 애쓰지 말고, 너무 노력하지 말고,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줬으면.


 암환자가 되고 나서 또 하나 달라진 것은 더 이상 나이 먹는 게 싫지 않다는 것이다. 암은 젊을수록 위험하고 빨리 진행된다는 얘기를 들어서일까, 삼십 대라는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린 내 신세가  마음 아파서일까. 그냥 얼른 나이가 들어서 '이제 살만큼 살았다.'하고 인생에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인지 '서른아홉'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큰 감흥이 없다. 10년 전, 스물 아홉 때를 돌이켜보면 인생의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 모두 끝나 버린 것 같아 아쉬웠는데. 지금은 삼십 대의 끝자락에 있지만 삼십 대에 대한 미련은 없다. 나는 정말이지 열심히 살았다.


 지금은 그저 인생의 시계를 태엽을 감듯 빨리 돌릴 수 있다면 미래로 이동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뿐이다.  소녀 시절, 어른의 삶을 동경했던 것처럼 지금은 할머니의 삶을 꿈꾸게 된 서른 아홉의 내 모습. 빨리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고 싶다. 딸아이의 사춘기를 함께하고, 딸아이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그 순간 내가 함께 할 수 있기를 꿈꾼다. 다른 엄마들처럼 그저 평범하게.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함께 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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