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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진경 Dec 26. 2021

크리스마스의 산책

 산책을 하면 집에 있을 때보다 소은이와 더 반짝이는 대화를 나누게 된다. 오늘은 마음과 사랑을 나누는 크리스마스. 남편이 만든 부침개를 들고 소은이와 단 둘이 외갓집으로 배달을 나섰다. 영하 15도의 강추위라 해도 우릴 막을 순 없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히 중무장을 하고 길을 떠난다. 길을 나서자마자 소은이가 재잘거린다.


S: 엄마랑 산책 나오니까 참 좋다.

M: 그래? 엄마도 소은이랑 산책 나오니까 참 좋다.


 그때 크리스마스 전구 장식을 해둔 나무들이 눈에 보였다. 불빛이 까만 밤을 반짝반짝 수놓은 별들처럼 빛났다. 소은이는 '아, 예쁘다!'를 연신 외치며 좋아했다.


 S:  엄마. 겨울에는 나뭇잎이 다 떨어져서 나무 춥겠다.

M: 맞아, 그래서 나무가 춥지 말라고 저렇게 불을 켜 두는 건가 봐!


 사실 왜 겨울에만 나무에 전구 장식을 하는지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소은이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파트 화단에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꽃이 예쁘게 피고 지는 봄, 푸른 잎이 울창한 여름, 단풍이 곱게 물드는 화려한 가을에는 굳이 인위적인 장식을 더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겨울에만 트리 장식을 하는 이유는 정말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보여서일지도 모른다. 형형색색 빛나는 전구들을 보며 나의 마음도 순간 따뜻해졌다.


M: 소은아, 오늘은 케이크를 사야 하니까 할머니 집에서 오래 있을 수 없어. 부침개만 전해 드리고 나올 거야.

S: 케이크? 오늘 우리 생일도 아닌데 케이크 사는 거야?

M: 응, 오늘 예수님 생일이잖아. 크리스마스가 예수님이 태어나신 생일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케이크를 먹으며 예수님 생일을 축하하는 거야.

S: 우와, 신난다! 그럼 내가 먹고 싶은 걸로 골라도 돼?

M: 그럼~ 되지. 오늘은 소은이가 먹고 싶은 케이크로 사줄게.

S: 만세!


 평소 케이크는 생일에만 먹는 거라고 알고 있는 소은이는 예수님 덕분에 케이크를 얻어먹게 되어 진심으로 기뻐했다. 오늘이 아기 예수님 탄생일이라는 사실을 나름 효과적으로 전달한 셈이다. 부모님께 부침개를 전달하고, 집에 오는 길에 케이크를 사고, 저녁에는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갈 계획이었다.

 

 매서운 추위와 코로나로 온종일 집에서 뒹굴었지만 크리스마스에 미사를 빠질 수는 없는 노릇! 소은이가 아주 어렸을 때도 오늘만큼은 꼭 성당에 갔던 기억이 난다. 신자가 아닌 아빠와 형부도 함께. 문득 온 가족이  함께 했던 크리스마스가 그리워졌다. 다시 그렇게 자유롭게, 만날 날이 올 수 있을까?


  마스크를 하고 있었지만 코끝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은 생각보다 매서웠다.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천천히 걷는 소은이를 어떻게 하면 빨리 걷게 할 수 있을까? 그때 소은이가 쓴 토끼 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아기 토끼로 변신할 시간! 나는 이번에는 거북이가 되기로 했다.


 "아기 토끼로 변해라, 얍!" 이렇게 먼저 소은이에게 주문을 건다. 우리의 역할극은 이렇게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M: 아기 토끼야! 우리 달리기 시합할까? 난 거북이야!

S: 거북이? 좋아! 우리 빨리 가자!


 소은이는 역할극을 하면 눈빛이 달라진다. 평소 짜증을 내다가도 역할극에 돌입하면 연기를 하느라 본래의 감정을 잊을 정도니까. 터덜터덜 느리게 걷던 걸음이 바로 깡충깡충 토끼 걸음으로 바뀌었다. 소은이와 손을 맞잡고 빠르게 걷다 뛰었다를 반복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우리 둘 다 마주 보고 웃었다. 달리고 나면 상쾌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쿵쾅쿵쾅 뛰는 심장 박동이 꼭 소은이와 내가 연결된 것만 같다. 아주 오래전 내 뱃속에서 소은이가 탯줄로 연결된 것처럼.


 외갓집에 가는 길은 소은이가 아침마다 어린이집에 가는 길이다. 소은이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마트에서 배달을 하는 오토바이 아저씨와 인사를 나눈다. 오늘도 오토바이 아저씨와 마주 소은이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아저씨와 명랑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S: 안녕하세요!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우렁찬 지, 아저씨도 금세 소은이를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든다.


S: 거북아, 매일 어린이집 갈 때 나한테 인사해주는 아저씨야.


 소은이는 새삼스럽게 나에게 아저씨를 소개하며 뿌듯해했다. 삭막한 세상이지만 이렇게 아이에게 친구인 어른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아이의 인사에 미소로 답할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아주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지만 나에게는 크리스마스에 느낀 작은 행복이었다.


 드디어 할머니의 집이 보인다. 조금 더 옆에는 어린이집이 보인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소은이가 소리쳤다.


 S: 거북아, 저기 우리 할머니 집이야! 저긴 우리 어린이집이고!

M: 어~ 정말이네. 저기 어린이집도 보이네.

S: 응, 그런데 이제 우린 헤어져야 해(슬픈 목소리로)

M: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왜 헤어져?

S: 난 이제 유치원에 가야 하거든. 거북이 너는 어리니까 갈 수 없어. 그곳은 토끼들만 가는 토끼 유치원이야.


 이럴 수가. 소은이는 벌써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유치원에 갈 마음의 준비가 다 된 것 같았다. 유치원에 가려면 아직 두 달이나 남았는데, 마음은 이미 유치원에 가 있는 듯. 나는 얼떨떨하여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 그 순간 신호등이 바뀌어 후다닥 길을 건넜고, 이렇게 오늘의 역할극은 막을 내렸다.

  

 오늘처럼 아이의 친구가 되어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엄마로서 아이와 대화할 때보다 더 진솔한 얘기를 하게 된다. 때론 아이의 속마음을 살짝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때론 내가 정말로 아이의 친구가 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와 단 둘이 산책하는 이 시간이 정말 좋다. 소은이가 나이를 먹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손을 잡고 산책을 하는 모녀가 되고 싶다.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숨이 찰 때까지 뛰기도 하고, 마주 보고 웃을 수 있는 그런 시간들. 그 소중한 순간들이 오래오래 계속되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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